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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하게 살기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15년 1월
평점 :
하아타니 겐지로 선생님의 새 책이 나왔다니!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랐다. 제목이 ‘상냥하게 살기’라니 선생님답다 싶으면서도 ‘상냥함’이 어떤 의미로 쓰인 건지 확실히 알고 싶어졌다.
열한 살 된 딸이 이가 상해서 치과에 데리고 가면서 책을 들고 갔다. 치료를 기다리며 의자에 누워 있는 딸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의사선생님이 책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상냥하게 살기’라니까 ‘상냥하게 살면 다 된다는 이야기겠네요.’라며 무슨 자기개발서 쯤으로 이해하는데 ‘아, 제목만 보면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구나.’ 싶었다.
책을 읽으며 책이 점점 망가졌다. 무슨 얘기냐면, 읽다가 ‘아, 이건 정말 맞아.’ ‘참 재밌다.’ ‘아, 따뜻해.’ ‘아, 이렇게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울림이라니.’ 하는 곳이 나오면 책 모서리를 접어가며 읽었는데, 접다 보니 너무 많은 곳을 접어버린 거다. 접힌 곳이 겹쳐 책장이 뜨니까 꾹꾹 눌러 얇게 만들었는데, 너무 세게 눌러 접는 바람에 곧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그만큼 좋은 책이다.
아와지 섬 시골 마을에서 작물을 기르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배워가는 1부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이타니 선생님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은 내가 흠모하며 우러르던 ‘스승’ 하이타니 선생님이 왠지 ‘친구’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농촌에서 겪는 일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면서도 때때로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전하며 이야기 뒤에 종종 덧붙이는 ‘익살’ 때문이었다. 아, 이렇게 익살스러운 면이 있는 분이었구나 싶으면서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고맙게도.
내 코흘리개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하나둘씩 줄어간다.
올해도 매화꽃이 피었다.
나는 희고 작은 꽃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이 중 어떤 꽃이 사카키바라 씨일까 생각한다. 이모는 어떤 꽃일까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매화나무 밑에 작은 생명을 묻는 버릇이 생겼다.
작은 생명은 붕어나 잉어 머리일 때도 있다. 유리문에 부딪혀 죽은 작은 새일 때도 있다.
어릴 때 많이 했었지, 생각하며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조촐한 장례식을 치른다. (94쪽)
1부에서 지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매화꽃을 보며 명상하는 이 장면을 옮겨 보았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의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사회와 교육 문제에 관한 쓴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건져 올린 깊은 생각이 가득한 2부와 3부의 이야기는, 내가 교사이기도 해서 그랬겠지만 절절하게 공감하면서 읽었다. 읽다가 여러 번 울컥해서 눈물을 흘리고 닦고 했다.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 모든 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야기들이었다.
‘상냥함의 근원’이란 소제목 아래 이어진 아래 글을 읽고 ‘상냥함’이 어떤 뜻인지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 아이는 점심값을 아껴 장난감을 사고 “아기가 돌아오면 이 장난감을 줄 거다. 빨리 돌아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아이의 상냥함 앞에, 나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가혹한 상황에서도 훌륭한 인간이고자 하는 어린 영혼의 모습에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다리를 놓는 어린 전사를 본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찾던 인간상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고사명 씨, 세쿼이아와 임영길 씨, 그리고 아오야마 다카시의 공통점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고자 하는 정신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모릅니다.(262~263쪽)
상냥하게 산다는 건,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며, 차별 없이 사랑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고자 애쓰는 것이다.
2015년을 시작하며 이 책을 읽게 되어 참 고맙다. 적어도 올해는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고자 애쓰며 살아야겠다. 절망으로 뒤덮인 이 땅에서.
끝으로 교사로서 하는 반성 하나 덧붙인다.
하이타니 선생님이 ‘보복과 본보기의 시대’에서, 학교에서 비행 학생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그 사실을 실명으로 교내에 공고하고 교내 봉사활동을 시키는 것을 비판하면서 교사들이 ‘죄를 짓는 꼴’이라고 하는 부분을 읽으며 교사로서 내 행동을 깊이 반성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에 대해 “벌을 주어야 한다니,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그것이 교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전율을 금할 수 없다.(220쪽)”고 꾸짖는 하이타니 선생님의 말이 앞으로 귓가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런 선생님이 되겠다고. 이런 어른이, 이런 사람이 되겠다고.
내게도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나는 배고픔을 못 이겨 학교 뒤편 밭에서 옥수수를 훔쳤다. 그리고 숙직 선생님에게 붙잡혔다. 그날 숙직 선생님은 내 담임 선생님이었던 후쿠다 선생님이었다. 후쿠다 선생님은 나를 꾸짖기는커녕 자기 집으로 데려가 흰 쌀밥을 배불리 먹여주었다.
나는 그때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