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와 내가
쉰네 레아 지음, 스티안 홀레 그림, 김상열 옮김 / 북뱅크 / 2021년 11월
평점 :
쉰네 레아 글 / 스티안 홀레 그림 / 북뱅크 출판사
보르테...보르테..보르테..... 알파벳 B로 시작하는 단어를 이야기하는 놀이에서 소녀는 이 단어를 떠올립니다. 내 인생의 거의 전부인 어떤 존재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소녀에겐 피해갈수 없는 단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에 여러분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환상적인 표지에 그만 홀딱 반했지 뭐에요. 그래서 이 그림책이 내 손에 올때까지 정말 정말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림 작가는 스티안 홀레 라는 분인데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유명하신분이라고 합니다.
글 작가 쉰네 레아는 노르웨이 시인이자 작가인데요 .바다가 배경이 되어 삶과 죽음에 대해 들려주기 때문인지 글밥이 꽤 되는 그림책인데도 불구하고 한편의 시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글도 좋지만 글의 진정성을 그림이 아주 강렬한 메시지로 전달해주고 있다는 거에요. 사실에 기반한 그림이 쭈욱 나오다가 어느순간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환상적인 그림이 쭈욱 펼쳐지고 다시 사실적인 그림으로 끝을 맺습니다. 색감이 전체적으로 따뜻해요. 애니메이션 같이 화려한 장면도 있고, 톤다운된 차분한 장면과 사진처럼 세밀한 장면까지 다양합니다. 개성강한 그림들이 글의 서사에 맞춰 리듬을 타는것 같아 그림만 보아도 참 흥미로운 그림책입니다.
작가는, 할아버지를 잃어버릴것만 같은 두려움에 갖힌 한 소녀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아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는거죠.
사랑하는 이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소녀의 마음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 존재가 내가 유일하게 기댈수 있는 어른이고 , 아직 홀로서기에 아무런 준비가 되있지 않은 상태라면 그 마음이 어떨까요? 게다가 소녀에게는 부양해야할 철부지 남동생까지 있으니까요
뱃놀이를 떠난 할아버지는 크고 작은 섬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우리의 인연또한 저렇게 시작되고 사라지기도 하는거라고.
할아버지는 묻습니다. 소녀가 남동생에게 수영을 처음 가르쳤을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이 어린 녀석이 과연 수영을 배울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결국 동생의 몸을 더이상 잡아 줄 필요가 없어졌을때 느꼈을 성취감을 회상시켜줍니다. '밤이 두려울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바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주머니처럼 밤을 생각하면 덜 두려울 거라는 게 할아버지의 생각이다' 라는 문구는 시의 한 구절처럼 들립니다.
' 할아버지는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동생이 내 방에 뛰어 들어와 내가 며칠이나 걸려 지은 멋진 탑을 무너뜨렸던 일을 기억하는지 할아버지가 묻는다. 늙음은 그런식으로 찾아오지. 할아버지가 말한다. 나는 그냥 놀고 싶었을 뿐이야. 동생이 멋쩍어 한다. 겨우 탑 하나가 무너지는 거야. 할아버지가 덧붙인다 '
'우리가 노를 저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하지 그 내용이야 아무려면 어때. 그래, 내가 이 말을 하는 게 처음이 아니지? 할아버지가 말한다 ' 엄마도 아빠도 없이 할아버지와 살아가지만 할아버지는 인생의 태도를 손주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이렇게 좋은 멘토가 되줄 멋진 어른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계속 노를 젓던 할아버지는 이제 체력이 탈진해 배에 눕게 되고 바람부는 바다 한가운데에 소녀는 이제 혼자 노를저어 집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소녀는 이제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는 상황인거에요. 그때 동생이 묻습니다. 만약 자기가 바다 저 멀리 나갔는데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할거냐고.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소년은 계속 묻습니다. 누나는 무섭지 않아? 소녀는 답합니다. 나는 무섭지 않아. 왜냐하면 니가 무서워하고 있을거라는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동생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누나가 무서워하면 되겠냐고 !
힘들지만 우리가 매일 한발자국씩 전진할수있는 이유!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닐까요? 내가 느끼는 두려움 따위는 내 동생이 느낄 두려움에 견줄수 없는것이 되는것 , 바로 가족의 사랑이겠지요. 저 먼 바다로 떠날수 있었던 소년도 자신에게 무슨일이 닥치면 구하러 와줄 누나가 있었기에 떠날수 있었던게 아닐까요?
소녀는 혼자 노를 저어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곤히 잠든 할아버지 귀에 대고 말합니다. 누나는 슬픈게 아니라 두려운거라고. 할아버지가 죽을까봐 너무 두려운거라고. 소녀는 할아버지 없이 혼자 해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안아줍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할아버지는 손녀딸의 마음을 읽어주고 오래살긴 했지만 조금 더 살수 있다며 소녀를 안심시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방수 외투에 얼굴을 묻으며 언제나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 집 냄새를 맡습니다. 여러분도 향기로 기억되는 어떤 사람이 떠오르지 않으신가요 ?
동생은 누나에게 저 망망대해를 거뜬히 넘을수 있는 큰 배 한척을 만들어 선물하겠다고 약속하며 이 책은 끝이 납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뭉클해옵니다. 이렇게 또 누나는 동생의 존재에 힘을 얻어 한걸음 내딛게 되겠지요?
마지막 장을 덮고 표지를 다시 펼쳐봅니다. 할아버지의 힘찬 노젓는 소리와 물방울 튀는 소리가 전해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아버지는 힘차게 노늘 젓겠지요. 사랑하는 손주들을 돌봐야 하니까요.
할아버지가 없는 배를 이제 소녀는 소년과 함께 다시 힘차게 노를 저을겁니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그대로 말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그 유한한 삶을 마무리해야 겠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저도 저리 쿨하게 답할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나하나 공들여 쌓은 탑이 한순간 허물어지는것을 그 쯤이야 라고 말할수 있을지......공교롭게도 이 책을 선물 받은날 제 친구 하나가 췌장암으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이 그림책을 읽으며 그 친구가 내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삽화를 보며 저는 중간중간 르네 마그리트 라는 화가가 떠올랐어요 ! 초 현실적인 상상의 장면도 함께 만끽해보시면 재미있으실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