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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17년 4월
평점 :
트럼프를 맞이한 미국, 그들에게 숨겨진 속사정
필리핀은 두테르테를 맞았고, 프랑스에서는 르펜이 결선 투표까지 올라 대통령의 자리를 눈앞에 두었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했으며, 미국 또한 그 추세에 맞춰 도날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맞이했다.
세기 초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공약들이 현실화 되고 있다. 미국은 멕시코와의 장벽을 더욱 높이려 애쓰고, 테러위험국가 출신 거주민의 비자발급을 막고 있다. 차츰 잦아들던 혐오범죄 또한 다시 잦아지려는 추세에 있다. 세상은 트럼프를 미치광이라 부른다. 그런 미치광이의 당선에는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의 결집이 큰 역할을 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건국 이래 쭉 미국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한 WASP의 반란. 그들은 어째서 트럼프의 손을 들었을까? 그들이 트럼프에게 바란 미국은 무엇이었을까?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는 그런 질문을 가진 독자에게 답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버무린 샐러드(tossed salad)가 되기 전까지 미국이 지켜오던 신념은 무엇인지, 그 신념에 의지한 보수적 미국인들의 자부심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설명하는 작가는 현 세태의 해설자이자 현 세대의 대변인이다. 미국의 정체성은 다문화로 인해 흐려졌는가? 앞으로 미국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건국 초, 직접 땅덩어리를 넓히던 미국은 이제 이민자가 제 발로 들어오는 ‘꿈의 나라’가 되었다. 근로윤리에 의해 일하기를 좋아하고, 국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요구하는 미국의 특성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아메리칸 드림’. 성공을 꿈꾸던 제 3세계 국민은 예외 없이 미국으로 향했고, 그렇게 미국에서 윤택한 생활을 일구어낸 이민자의 성공담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어여쁜 이름으로 수식되었다.
그러나 그런 미국은 영원하지 않았다. 밀려드는 이민행렬과, 세계대전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국가적 자긍심의 결핍은 기존의 시스템마저 위협하는 추세가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탄생, 히스패닉 문화의 확산 같은 세계화의 변수가 미국을 덮쳤다. 이민의 지역적 집중화가 종내에는 미국의 다언어화를 이끌어낸다는 시각이 흥미로웠다.
필자의 기억을 되짚어 볼 때도, 7~80년대 매체에선 심심찮게 등장하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표현이 21세기 들어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느낌이다. ‘인종간 갈등’, ‘문화적 충돌’이라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미국을 대체한 지도 제법 오래 되었다. 미국이 우방국가와 불량국가를 공개적으로 구분하며 편가르기를 하던 것이, 국민통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전쟁 없는 미국은 내부적으로 과도기를 겪고 있다. 기회의 평등과 문화적 존중을 이유로, ‘미국’에 포함되었던 보수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기존의 정체성을 버리는 WASP의 고조된 불만. 정치인들은 그런 불만을 애써 무시하고 다문화 사회를 구축해 갔다.
당장 인천에 존재하는 차이나타운이나, LA에 위치한 코리아타운 또한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골칫거리가 아니겠는가. 이 내용을 한국에도 부분적으로 대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명동거리가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국민이 우선’, ‘상인 입장에서는 주요 고객층을 상대하는 게 우선’이라는 상반된 입장으로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결국 명동거리는 여전히 중국어 간판을 우선하며 중국어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이 현재 이민자를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각과 비슷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 같은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엘리트들과 공통의 국가적 정체성에 동화될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일반대중 사이에 넓은 바다가 있다.” – p. 402
“일반적인 미국인들이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적절한 역할이라고 믿는 것과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지도자들의 견해 사이에 혼란스러운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 p. 408
트럼프의 집권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곳이다. 국민의 아픈 곳을 긁어주던 트럼프의 거침없는 언행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트럼프 선택은 단순한 객기가 아닌 내재된 분노의 표출이며,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귀띔한다.
전체적인 미국의 역사를 되짚는 책인 줄 알았는데 건국 이래의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당황하기도 했다. 여타 서적에 비해 전문적인 요소가 더 많이 들어있어 배경지식이 없으면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50페이지가 넘는 참조자료의 양이 그 전문성을 대변하는데, 쉬어간다기 보다는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는, ‘우리는 누구인가’가 아닌 ‘그들은 누구인가’로 제목을 바꾸면 책의 유용성이 상당히 높아진다고 이야기한다. 170만명의 한국인이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미국과 각종 외교적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지금, 책이 담은 내용은 우리의 현실과도 근접해있다. 2004년에 쓰여진 이 책이 과거를 통해 되짚는 미국의 미래는 현실과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