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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
안동일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평점 :
누락된 과거, 되살리는데 40년
1979년 10월 26일에 국민들은 제각기 다른 평가를 내린다. 국가원수 암살과 민주주의 부활이라는 극한의 가치대립은 10.26에게 ‘사태’와 ‘혁명’, 두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저자는 ’10.26 사건’이 탄핵 정국에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재평가를 받았다며, 네티즌들이 붙여준 수식어를 그 증거물로 삼았다. ‘의사’를 비롯해 ‘열사’, ‘민주투사’, ‘재규어’ 등 김재규의 넋을 기리는 화려한 수식어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김재규의 명예회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붙여준 별명은, 여전히 김재규의 공보다 박정희의 과를 비웃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보면, 아직 그를 부역자로 취급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그들에게 김재규는 ‘독재정권 밑에서 일하다가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상관을 죽인 부역자’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 한다. 그렇기에 김재규의 묘소는 약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흠집 나고 찢기는 등 바람 잘 날 없다. 옹호여론이 약하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설움이다. 저자는 그런 김재규의 변호사로서, 그에게서 느꼈던 민주주의의 열망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당시의 기록에 여전히 세뇌 되어 김재규를 규탄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책에서 드러나는 누락된 법정 기록들은 대부분 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김재규의 모습이었다.
“제가 만일 집권하게 되면 저도 틀림없이 독재합니다. 독재가 싫다고 혁명한 사람이 다시 독재할 요인을 만들 턱이 없습니다. (중략) 또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운 민주정권이 서게 됐을 때 민주정권을 옹호해야 할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그것은 저 아니고는 안 됩니다.” (p. 90)
실제로 극심한 간경변을 앓아 권력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는 김재규. 그는 역시나 진심을 의심하는 검사와 판사에게 과거의 행적을 해명한다. 긴급조치 10호 건의는 악독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발판이었고, 김영삼의 제명을 가로막은 것도 자신이었다.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혁명이 끝난 뒤 그 혁명이 엇나가지 않게 관리할 필요가 있어서라고 했다.
“유신 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가 안 갑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민주, 민권, 자유, 평등입니다. 그리고 3권 분립이 특징입니다. 결국 한국이나 서유럽 어떤 나라든 간에 민주주의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p. 101)
불교신자인 김재규는 평생 살생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p. 3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자신의 희생과를 숙명적 관계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p. 301) 대통령 암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가장 객관적인 심판이 되어야 할 재판이, 수많은 편파와 왜곡으로 훼손되어 그의 기치 또한 빛을 바랠 수 밖에 없었다. 여덟 차례에 걸친 공판조서는 단 한 차례도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고, 재판 중 주어진 시간 또한 촉박했다. 피고인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한 공판 절차 정지 신청서도 때마다 누락 되었다. 항소이유보충서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먹구구식 재판에서 김재규가 받을 죄목은 처음부터 ‘내란죄’로 정해져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에서 김재규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언론에게 그는 ‘개만도 못한 인간’ 취급을 받으며 모욕을 당했다.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고 신뢰를 배반으로 보답했을 뿐이다. 그 한 가지로서 그는 인간 이하로 떨어진 것이며,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개도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이니까.” (p. 45 조선일보 발췌)
미래가 과거를 평가하는데 있어 가장 큰 기준은 기록이다. 그 기록이 독재정권의 월권으로 누락된 이상 김재규를 향한 사람들의 오해와 조소는 당연한 것이었다. 피고인에게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재판관 여섯 명의 기록도 권력의 잔재 앞에 사라졌다. 피해자들이 한탄할 것은, 독재정권의 끝이 새로운 군사정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김재규, 또한 최규하가 원했던 ‘자유민주주의 정권으로의 자연스런 이양’은, 결국 8년의 세월을 자연스럽지 않게 기다려야만 했다. 만약 올바른 차기 정권이 들어서 ‘10.26 사건’을 이른 시간에 재평가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김재규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김재규는 그런 국정혼란을 예상하고 있었다. 최후 진술에서 사태를 미리 경고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빨리 민주 회복을 안 하고 시간을 끌다가는, 내년 3~4월이면 틀림없이 민주회복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지금은 국가의 핵이 없습니다. 정부가 통제력이 없고 국민은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큰일을 당하면 뭐가 될지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미리미리 없애라고 권고 드리고 싶습니다.” (p. 305)
결국 사태가 5.17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까지 치달았던 건 이를 방관한 윗사람들의 몫이었다. 박정희 시절의 유산인 그 윗사람들 말이다. 혹자는 박정희가 곧 물러날 사람이었다며 김재규의 행동을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격하한다. 그러나 김재규가 판단한 박정희의 권력욕은 무한했고 평화적으로 막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박정희를 보좌한 김재규가 알려준 그의 몇 가지 비밀을, 저자는 40년간 묵혔다가 오늘에서야 풀었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 또한 그 비밀의 일부였다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을 무너뜨렸다는 그의 말은 더 이상 허투루 받아들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했던 변호인과 재판관들은 사형집행과 동시에 수배 되거나 탄압 받아야 했다. 저자 또한 자신이 따로 기록한 재판흔적을 다른 곳에 숨겨두고 장시간 쥐 죽은 듯 지내야 했다. 신뢰할 수 없는 시대의 기록에게 보내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지양 되어야 한다. 과만 남겨진 과거의 기록보다는, 현재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김재규의 공을 평가해 보는 건 어떨까. ‘김재규’라는 사람을 평가하는 건 개인의 몫이지만, 왜곡된 인간상을 되살리고 공정한 심판대 앞에 놓는 건 국가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