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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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해서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상으로 올라간다. 사랑의 지고지순함은 지옥이나 지상의 어떤 가치도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천상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고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하지만 저자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무신론자로서 천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탐구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먼저 살펴본다. 지상으로부터의 속박을 걷어내고 대지에 속박되어야만 했던 인간의 한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그것이 그의 탐구 대상이다. 인류의 끝없는 노력으로 인해서 기구를 통해서 그 한계를 벗어난 사람들. 그들은 최초로 하늘을 탐색할 권한을 얻는 대신에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의 숙명은 그대로 껴 안고 있었다. 신이 존재하던 공간을 침투한 인간은 그곳에서 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으며, 신은 그자리에서 추방 당했다. 하지만 자연이 주는 힘이 없다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으며 광할하고 자유를 얻고 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대신에 그 순간이 사라지면 어느새 지상에 내장을 들어내거나 다리뼈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추락을 경험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얻은 그들의 자유를 기록에 남기고자 했으며, 나다르는 항공사진의 이미지를 개척한 최초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지상의 속박을 벗어났다 돌아온 그들을 지상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지상의 사랑은 영원한 것일까? 아니 지상의 사랑은 최소한 지고지순한 일면을 유지해 줄 수 있을까? 지상의 사랑은 지고지순함을 간직한 천상의 사랑과 다른 것인가? 작가가 찾아나선 지상의 사랑은 일순간 덧없음을 알려줄 뿐이다.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귀기울이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건만 사랑은 어느 순간 떠나고 텅빈 공허함만이 자리를 잡는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없다. 사랑의 시작과 끝만이 존재할 뿐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는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의 시간이 한정된 만큼이나 사랑의 시간도 짧게 느껴질 뿐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탐색하는 곳은 지옥이다. 우리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지옥이 아니라, 현실속에 존재하는 지옥이 아닌 자신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그리고 저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떠나고 남은 자리, 빈공간은 그저 채울 수 없는 고통의 쓴맛이 대신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는 고통의 창을 들고 누군가를 찌르고 싶어진다. 그 창은 한쪽으로만 날이 선 창이 아니다. 타인을 찌르는 쾌감으로 자신에게 위안을 줄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창의 반대편은 자신의 심장을 짖뭉개는 또 다른 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과 공허함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영원한 시간일 뿐이다. 자신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여 그 고통으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통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무간 지옥에 빠져든 것이다. 누구의 위안도 결코 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은 지상의 천국이지만, 그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내야하는 순간 이후는 지옥의 열도속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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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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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후기에서 책의 의미를 사소한 것에 대한 유의미함으로 존버거의 스케치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사소함"에 담긴 의미는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담긴 의미일 수도 있다. 본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행위가 종합되어 있고 그 의미는 유의미하게 남아서 뇌리 깊은 곳에 새겨질수도 혹은 무의미하게도 보는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자가 생각하는 사소함에 있어서 담겨 있는 의미라는 것을 이끌어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다는 행위와 그린다는 행위는 사소함에 담긴 함의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의식이 발산하는 능동적 의지를 투영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림 속에는 자신의 자의식과 행위 의식이 일치하는 부분은 그림에 남을 것이며 불일치 부분은 그림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는 현실속에 존재하는 단순한 사물이 그림 속에 반영됨으로써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곧 현실 인식과정이 개입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과정도 닮아 있다. 


존버거는 이 책을 통해서 그리는 행위에 단순히 전착하여 그 결과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신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그린다는 행위에 수반하는 책임감을 보여주고 여기에 개입되는 현실과의 투쟁이 들어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루카는 직접 아내를 보살폈지만, 로잘리는 서서히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 갔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다.

...

몇 달 후 병원에서는, 더 이상 로잘리를 돌볼 수 없다고, 사설 요양원을 찾아보라고 했다.

...

한달에 삼천오백 유로였다.

차로 요양원에 데려다 주자,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문 앞에서 미소를 지은 그 방으로 정했다.

그날 밤, 그는 은행 잔고를 계산해 본 다음 달력을 펼쳤다.

아내는 새 요양원에서 잘 지낼 것이다, 달력에 적었다. 삼 년 정도 정확히는 천구십오 일이다. 그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적고 사인했다.

<본문 中>


자본은 더 이상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계약에 의해서 올가미를 엮고 그 과정안에 금융이 매개하도록 하며 이 올가미를 벗어나려는 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 없이 자본에 감시 당하며 우리 자신을 조금씩 내다파는 생활을 연명할 뿐이다. 이 지구상에서 이제는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정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존버거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미래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금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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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
필립 쿤 지음, 이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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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지난날, 선량한 사람들에게 반국가적인 위험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공포와 의심을 조장했던 지난날을 떠올릴 수 있다"

- 저자 서문中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1785년은 청이 건국되고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여 명말 번영했던 상업이 다시 일어나고 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은이 유입되고 있어서 경제가 활황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청의 황제는 건륭제로 만주족의 완강하고 견고함을 물려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황제수업을 받아서 한족 문화와 예술에 정통해 있었다. 그는 만주족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족 에술 부흥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황제로 알려져 있다. 


청대 시기가 역사적 절정기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 때 과연 평화 시기는 모든 인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는가라는 의문점은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다. 실제 경제가 부흥하고 정치가 안정된다고해서 그 모든 혜택을 기층 인민들 하나하나가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러한 혜택은 가장 상층부에 있는 계급부터 흡수되어 아마 기층의 바닥까지 도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건의 기저에 희생양으로 등장하는 소외된 계층, 승려, 거지, 떠도는 자들은 자원의 분배 과정에서 소외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힘든 시기가 오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이 가장 약한, 소외된 계층부터라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이들을 탄압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이들은 경제적 경쟁속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원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물질적 풍요는 전체적으로 보면 한 국가를 부의 길로 이끌고 있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속에서는 그 부를 생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해야되는 인민들이 기저에 깔려 잇었던 것이다. 


1768년에 청 제국은 강성한 왕권을 기반으로 상당히 안정된 정치체제를 갖춘 진정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영토확장도 마무리된 상태다. 안정된 제국의 기반은 상위계층의 만주족과 그 협력집단이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서서히 한족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만주족 관료들의 민족적 정체성 상실과 동화에 불만과 고민이 많았던 청 황제의 입장에서는 변발을 잘라서 그것을 요술적 행위에 이용한다는 의미는 청 왕조의 민조적 정체성과 존립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만주족과 한족 관료들이 건들고 싶지 않은 저변에 깔린 왕조의 이데올러지 갈등을 표면화 시키면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왜 보이지 않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을까? 평상시에 항상 혼백들과 귀신들에 둘러 싸여 생활하던 일반 민중들이 왜 갑자기 요술의 공포를 확산 시키고 두려움에 떨었을까? 번영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던 시절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그것이 부풀어 오르고 사람들을 짓누르는 풍선처럼 커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단순히 무능하고 태만한 청조 관료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사건 처리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과 관료제가 낳은 모순이 동시에 존재 했다. 일반 민중은 그 사건이 낳은 공포를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사리사욕에 맞게 이용하려고 했고, 황제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관료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기로 했다. 대중들이 이해하는 요술의 공포는 동양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귀신과 혼백들에 대한 공포가 일상 생활에서 그 분출구를 찾아낸 상황이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광풍은 관료 시스템이 만들어낸 관료주의적 대응 방식의 공포다. 만주족의 고위 관료들은 한족 문화에 젖어들면서 나태하고 관성화되어 갔다. 건륭제는 이런 만주족의 동화 과정에 대해서 심히 우려를 표현했으며, 사건 때문에 각성의 순무들과 주접을 주고 받을 때에도 그런 의중을 들어내고 있다. 청조의 황제는 절대 권력을 휘두를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 권력은 시시때때로 제조적 제약에 걸려서 그 칼날이 무뎌졌으며,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감시의 눈길은 관료들간의 담합과 복지부동적 저항에 의해서 멈출수 밖에 없었다-건륭제는 이런 담합에 의한 복지부동 때문에 개인적인 첩자를 심어두고 보고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제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거나 눈밖에 난 무능한 관료를 숙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저자는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에 대한 사건을 분석함으로써 1786년 청조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려고 한다. 단순히 허황된 공포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고 거기에 공포는 증폭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폭풍속으로 이끌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마치 현대의 문화혁명과도 같은 광풍이 불 수 있는 요소였다. 대중의 망상과 건륭제의 환영이 결합하여 사건은 증폭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요술의 힘에 이끌려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간 것이다. 황제의 망상 때문에 그러부터 받는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소용돌이도 무능하고 타락한 관료체제 때문에 멈춘다. 이는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군신관계를 유지하던 도덕적 관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9ㅔ기말 서양의 침탈로 중국의 커다란 곤궁에 처했을 때 아무도 이런 청렴한 사상으로 무장한 관료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중국의 시절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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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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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역사를 배울 때 조선시대의 당쟁은 망국의 병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조선말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합병과정을 거치게 되는 주 원인으로 당쟁을 꼽는다. 하지만 이조 조선은 500년이라는 긴 역사적 시간을 유지한 보기 드문 왕조였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긴 역사를 유지한 왕조다. 이런 긴 시간동안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 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문치주의 행정이었으며, 이런 문치주의가 유지되도록 권력 분배가 안정성을 유지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당쟁이라면 아이러니일까.


조선의 당쟁사의 기원을 이 책에서는 조선 개창기의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당쟁 시작 부분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당쟁 기원에 대한 한국적인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고려말부터 조선개창기까지 주요 관직의 가문들을 추적해보면 그 핵심 가문들은 변하지 않았다는게 들어난다(<조선왕조의 기원>에서 고려시대 자료가 부족하여 전체 관료의 절반정도 확인되었지만). 우리가 조선이 개창하면서 분명 지방사족들이 큰 역활을 하고 조선초 정권창출에 지대한 역활을 했다고 인식하지만 실제 조선 관료 시스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당쟁의 시작과 격화는 조선에 이식되는 유교의 심화도에 따라서 격화되었으며 그 이행과정과 본질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와그너 교수의 논의에서도 보여지지만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새로운 관료들의 자유로운 등용과 고속승진을 위한 관문이었다(비록 닫힌계 안에서 귀족계층간의 관계 진출을 위한 열린 통로 역활을 했을지 모르지만).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음서제도는 고위 관리집안이 지속적으로 관료로 등용되어 쇠락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음서 제도를 통해서 관료진출이 용이했을지 모르지만 고위직으로 승진하거나 핵심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승진을 위한 하나의 관문이 존재함으로써 기존 당파적, 파당적 인물들로만 채우기 위해서 혈투를 벌이는 당파싸움에서는 불리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조선 관료층의 주요 핵심 문벌들은 흥망성쇄를 거칠지언정 크게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서로간 통혼을 통해서 세력을 공공히 하였고 그들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와그너 교수의 연구에서 들어났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북지방에서 대거 과거 합격자들이 등장한다. 이는 당파적, 지역적, 정쟁적 투쟁을 통한 당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서북지역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한 것이다. 이는 이례적이고, 이 현상에 대해서 책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이들이 당파적 투쟁 과정에서 어떤 역활을 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분명 지역적 색채에 묶이지 않고 당파적 투쟁 과정에서도 주요한 역활을 하지 않았을 듯 하다. 게다가 18세기 중반 경화사족 중심의 정계진출은 지역 특색과 학문 특색을 강조하던 당파 싸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경화사족들은 지방에서 부재지주의 역활을 하면서 오직 중앙 진출을 위한 노력에 경주했다. 이에 따른 부작용을 지방에 존재하던 많은 양반들이 관직 진출 기회가 줄어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당쟁은 지역적, 유교적 해석 차이로 인한 심화 과정을 거쳤다는 논의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조선중기로 들어서면 주자학에 대한 해석이 독자적 체계를 넘어서 교조적 해석으로 이행된다. 이런 대표적 사례가 송시열일 것이다. 그는 문인으로써 정치인으로써 가장 교조적 입장을 유지한 사람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진행했었던 주자학의 교조적 해석은 당파성에 있어서도 경직되고 융통성이 배제된 보수적 강령들이었다. 이런 보수적 경직된 유림의 고착화에 따라서 당쟁도 심화되고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기가 되면 당파적 파워 게임은 외척의 득세에 따라서 쇠락하고 그 힘을 잃는다. 조선 망국의 원인은 삼정의 문란과 정치적 혼란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을 유지하던 균형과 견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시스템 자체가 이완됨으로써 그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추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외부의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는 하부층, 즉 대농장을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조선 양반계층의 몰락을 촉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한 것을 본다면 조선의 구조적 모순들, 특히 보수적 이념인 유교의 작용은 조선말기의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기득권, 권력층의 지배 원리는 도덕적 우위였다. 그들은 유학을 함으로써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도덕적으로 깨끗함으로 하위계층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권위가 조선말기가 되면 쇠락하는 유학 때문에 결국은 그들의 통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외척이 득세하는 가운데 유학은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 당파적 갈등은 소멸(유학적 소멸)하고 외척의 득세가 이런 구도에 맞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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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 미암일기 1567-1577
정창권 지음 / 사계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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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바탕으로 저자가 16세기의 엘리트 관료의 일상사를 재현했다. 미암은 일찌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새 임금이 그를 다시 등용하여 관직에 복귀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그의 관직 복귀후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에 기반으로 작가가 편역을 한 글이다.


저자는 조선초의 노예 구성비를 1/3정도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외국학계에서는 2/3로 추정하고 있다. 노예들은 외거노비와 솔거노비가 있었고, 외거노비는 정기적으로 주인에게 노비로서 직접적인 봉사를 하지 않는 댓가로 물품을 바친 것 같다. 노예주들은 대부분 노예들에 대한 생계를 책임지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졌으므로 그들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엘리트 계층의 토지 독점으로 대농장의 소유주로서 거대 노비 조직들을 거느리고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노비들은 일반적인 서양의 노예들처럼 자유가 완전히 구속되어 극한의 환경에서 착취를 당하던 노예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일반 엘리트 계층을 위해서 생활의 보조 수단과 같은 존재로서 취급 받았고, 외거노비들 같은 경우는 노동력 제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물건처럼 매매가 가능하였고, 재산분배 과정에서 후대에 상속되었다. 미암 부부도 100(미암이 고위 관직에 있었지만 거대 부호는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일반적으로 엘리트 계층이 거느리고 있었던 노예들의 숫자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조선 사회가 미국 남부에서 노예를 이용한 농장 경영에서도 100명을 넘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거대 노예제 사회였다는 증거다. 노예는 세습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夫婦가 노예이면 당연히 자식이 노예였지만, 어느 한쪽이 노예인 경우 세습되는 기준은 婦를 기준으로 동작하였다. 이는 모계 사회의 영향인지 아니면 유교적 영향인지 모르겠다. 


조선초 시장이 발전하지 않은 자급자족에 가까운 경제형태속에서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선물을 통한 물물교환 형태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관례에 따라서 서로에게 인사치례 의미에서 선물을 보내고 이를 위한 생계 유지에도 많은 부분 의존 한다. 특히 미암이 지방관으로 내려갔을 때나 그의 처에게 지방관들이 식물이나 병사를 보내서 생계를 도운 것이 나온다 - 특히, 봄의 춘궁기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이 절실할 때 지방관들의 도움은 큰 것이다. 이런 지방관들의 도움은 받는 입장에서는 양반의 지위와 권세를 받쳐주는 좋은 버팀목이었지만, 이를 보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식물이나 병사들이 차출되어 양반들이나 권세가들을 도운 것은 그들의 삶에 커다란 손실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지방관 근무 연수는 평균 1년~2년 사이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생각보다 짧은 근무 기간이므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매점매석에 의한 관직을 수행한 이들은 그들이 관직을 사기위해서 투자했던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 열을 올렸으며, 일반적인 관리들은 그들이 서울로 복귀한 후에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던 관리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많은 착취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암의 일기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조선전기에도 이런 현상은 크게 차이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미암에게도 끊임 없이 선물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 물론 미암이 높은 관직에 있는 엘리트였으므로 그에게 잘 보여야만 할 충분한 이유는 있었다.  


유교적 이데얼러지가 정착되기 전에는 주거형태도 내외구분이 강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17세기에 주자학의 침투가 완료되는 싯점부터 한옥도 내실이 완전히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미암이 관료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서울에서는 세를 살았다. 그 당시에 세는 돈으로 지불하는 형식이 아닌 물품으로 정기적으로 집주인에게 상납된 것으로 나온다. 특히 반찬거리가 많이 활용된 듯 하다. 


조선초 제사는 남녀 구분 가리지 않고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행이 성행했으며 이는 재산 분배에 있어서도 형제자매간 균등분배를 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상속에 있어서 균등분배는 고려때부터 풍속이었으며 조선초까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게다가 특별히 장자를 선호하지 않았으며 친가, 외가를 가리지 않고 후손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능하였다. 미암의 부인 덕봉은 외가쪽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미암 대신에 시부모 상을 치르고 친가쪽 제사도 모신 것으로 나온다. 이런 풍속은 결혼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고려때부터 이어온 처가살이가 보편적 결혼 생활 형태였다는 것이다. 남자쪽이 처가살이를 함으로써 재산상속에서도 어느정도 배제되지 않고 처가쪽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항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분재기에 나와 있는 문서를 분석함으로써 그 명확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음서 제도는 고려때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엘리트 계층이 자신의 자식들을 특정 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관직에 등용하는 방법인데, 미암의 책에서도 그의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몇년간 공부만 하다가 능을 지키는 관직에 등용되는 장면이 묘사된다. 물론 조선에서 중앙의 권력층으로 들어갈려면 음서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했더라도 과거 시험을 통해서 다시 그 능력을 인정받아야만이 빠른 승진 기회를 잡을 수 있는것으로 나온다. 결국 조선의 엘리트 계층의 자신들만의 계층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운 관직 진출의 출구를 열어놓고 경쟁하였던 것이다. 양민이나 노비 같은 경우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글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유교를 교조적, 문자적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 권한을 정당화한 양반 관료들이 차별을 정당화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을 윤리적, 물리적으로 정당화 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유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암의 경우 부인이나 아랫 사람들에게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다면 조선 사회가 중기, 후기로 갈수록 얼마나 경직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천민이나 적서 차별의 경직화는 유교의 평등주의 사상 자체를 조선식으로 이식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런 이데올러지가 누적되어 현재에도 변하지 않는것이 아닐까. 이런 이데올러지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를 두려워하고 포기한 인민들이 현재의 유권자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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