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 미암일기 1567-1577
정창권 지음 / 사계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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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바탕으로 저자가 16세기의 엘리트 관료의 일상사를 재현했다. 미암은 일찌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새 임금이 그를 다시 등용하여 관직에 복귀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그의 관직 복귀후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에 기반으로 작가가 편역을 한 글이다.


저자는 조선초의 노예 구성비를 1/3정도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외국학계에서는 2/3로 추정하고 있다. 노예들은 외거노비와 솔거노비가 있었고, 외거노비는 정기적으로 주인에게 노비로서 직접적인 봉사를 하지 않는 댓가로 물품을 바친 것 같다. 노예주들은 대부분 노예들에 대한 생계를 책임지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졌으므로 그들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엘리트 계층의 토지 독점으로 대농장의 소유주로서 거대 노비 조직들을 거느리고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조선의 노비들은 일반적인 서양의 노예들처럼 자유가 완전히 구속되어 극한의 환경에서 착취를 당하던 노예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일반 엘리트 계층을 위해서 생활의 보조 수단과 같은 존재로서 취급 받았고, 외거노비들 같은 경우는 노동력 제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물건처럼 매매가 가능하였고, 재산분배 과정에서 후대에 상속되었다. 미암 부부도 100(미암이 고위 관직에 있었지만 거대 부호는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일반적으로 엘리트 계층이 거느리고 있었던 노예들의 숫자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조선 사회가 미국 남부에서 노예를 이용한 농장 경영에서도 100명을 넘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거대 노예제 사회였다는 증거다. 노예는 세습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夫婦가 노예이면 당연히 자식이 노예였지만, 어느 한쪽이 노예인 경우 세습되는 기준은 婦를 기준으로 동작하였다. 이는 모계 사회의 영향인지 아니면 유교적 영향인지 모르겠다. 


조선초 시장이 발전하지 않은 자급자족에 가까운 경제형태속에서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선물을 통한 물물교환 형태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관례에 따라서 서로에게 인사치례 의미에서 선물을 보내고 이를 위한 생계 유지에도 많은 부분 의존 한다. 특히 미암이 지방관으로 내려갔을 때나 그의 처에게 지방관들이 식물이나 병사를 보내서 생계를 도운 것이 나온다 - 특히, 봄의 춘궁기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이 절실할 때 지방관들의 도움은 큰 것이다. 이런 지방관들의 도움은 받는 입장에서는 양반의 지위와 권세를 받쳐주는 좋은 버팀목이었지만, 이를 보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식물이나 병사들이 차출되어 양반들이나 권세가들을 도운 것은 그들의 삶에 커다란 손실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지방관 근무 연수는 평균 1년~2년 사이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생각보다 짧은 근무 기간이므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매점매석에 의한 관직을 수행한 이들은 그들이 관직을 사기위해서 투자했던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 열을 올렸으며, 일반적인 관리들은 그들이 서울로 복귀한 후에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던 관리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많은 착취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암의 일기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조선전기에도 이런 현상은 크게 차이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미암에게도 끊임 없이 선물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 물론 미암이 높은 관직에 있는 엘리트였으므로 그에게 잘 보여야만 할 충분한 이유는 있었다.  


유교적 이데얼러지가 정착되기 전에는 주거형태도 내외구분이 강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17세기에 주자학의 침투가 완료되는 싯점부터 한옥도 내실이 완전히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미암이 관료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서울에서는 세를 살았다. 그 당시에 세는 돈으로 지불하는 형식이 아닌 물품으로 정기적으로 집주인에게 상납된 것으로 나온다. 특히 반찬거리가 많이 활용된 듯 하다. 


조선초 제사는 남녀 구분 가리지 않고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행이 성행했으며 이는 재산 분배에 있어서도 형제자매간 균등분배를 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상속에 있어서 균등분배는 고려때부터 풍속이었으며 조선초까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게다가 특별히 장자를 선호하지 않았으며 친가, 외가를 가리지 않고 후손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능하였다. 미암의 부인 덕봉은 외가쪽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미암 대신에 시부모 상을 치르고 친가쪽 제사도 모신 것으로 나온다. 이런 풍속은 결혼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고려때부터 이어온 처가살이가 보편적 결혼 생활 형태였다는 것이다. 남자쪽이 처가살이를 함으로써 재산상속에서도 어느정도 배제되지 않고 처가쪽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항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분재기에 나와 있는 문서를 분석함으로써 그 명확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음서 제도는 고려때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엘리트 계층이 자신의 자식들을 특정 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관직에 등용하는 방법인데, 미암의 책에서도 그의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몇년간 공부만 하다가 능을 지키는 관직에 등용되는 장면이 묘사된다. 물론 조선에서 중앙의 권력층으로 들어갈려면 음서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했더라도 과거 시험을 통해서 다시 그 능력을 인정받아야만이 빠른 승진 기회를 잡을 수 있는것으로 나온다. 결국 조선의 엘리트 계층의 자신들만의 계층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운 관직 진출의 출구를 열어놓고 경쟁하였던 것이다. 양민이나 노비 같은 경우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글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유교를 교조적, 문자적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 권한을 정당화한 양반 관료들이 차별을 정당화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을 윤리적, 물리적으로 정당화 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유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암의 경우 부인이나 아랫 사람들에게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다면 조선 사회가 중기, 후기로 갈수록 얼마나 경직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천민이나 적서 차별의 경직화는 유교의 평등주의 사상 자체를 조선식으로 이식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런 이데올러지가 누적되어 현재에도 변하지 않는것이 아닐까. 이런 이데올러지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를 두려워하고 포기한 인민들이 현재의 유권자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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