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후예 - 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기원 1876~1945
카터 에커트 지음, 주익종 옮김 / 푸른역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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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한 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세계경제안애서 살아남은 한국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박정희의 지도력과 (권력의 비호를 받은)소수재벌들의 성공적인 성장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에 좌파적 시각은 임금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지원하기 위한 농업의 희생과 임노동자들의 핍박 그리고 인권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어느쪽이 진실에 가까울지는 각자가 서 있는 입장에 따라서 판이하게 갈릴수 있는 부분이다. 


<제국의 후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1970년대의 급부상하는 한국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의 원동력, 즉 자본주의적 가능성이 이미 식민지 시절 잉태되었으며, 학습을 통해서 그 모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 민족적 기업이라고 알려진 경방이라는 기업을 통해서, 이 기업이 식민지 시절 어떻게 생성되고 번영하여 살아남았는지를 추적한다. 지금은 삼성이나 현대 같은 거대 재벌이 존재함으로써 그 이름이 극히 작아지기는 했지만 분명 아직도 그 역사적 의의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경방의 시작은 전라도의 지주집안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기원이 되는 전라도 만석꾼이 어떻게 일제시대 토지 수탈을 피해서 부유해지고 공업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일제시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수탈 당한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토지수탈의 많은 부분이 왕족이나 공유지등이었으며, 지주들의 토지는 별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으로 양곡수출이 이어지면서 김씨 집안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지주로서 그들은 마름을 통한 소작통 압박을 강하게 유도한다. 억압적 착취를 통해서 더 많은 소출과 이를 일본 수출로 이어지면서 부를 축적하고, 실제 김씨 집안은 지속적으로 농지를 확장한다(책에서는 이런 착취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없이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이런 착취가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는 근대사를 통해서 잘 알려진 부분이다). 덕분에 이 집안은 공업화가 시작되었을 때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이 충분히 축적된 것이다. 


1920년대가 되면서 식민지 총독부는 정책방향을 튼다. 이는 1919년의 3·1운동 영향이 크다. 이 즈음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한국에서 경방에 투자를 하고 있던 김씨 집안의 두 형제는 기회를 잡는다. 식민지 총독부가 한국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할 때 이들도 그 혜택을 받은 것이다. 실제 경방이 생산한 면사는 질이 별로 좋지 않았으며, 투자자금을 확보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총독부의 금전적 지원과 함께 식민지 은행들에서 대출이 발생한다. 그리고 경방이 발전을 거듭할수록 일본은행들은 더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고 상호출자도 한다. 이는 은행만이 아니다. 경방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와 기게들 수입에 있어서도 일본 업체들이 경방을 지원하고 좋은 조건으로 경방을 비호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조선 기업으로써 순수 민족적 기업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들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일제 식민지 정부는 식민지 경영에 있어서 한국기업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는 오히려 특혜를 주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극동아전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때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조선의 많은 부분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극화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친일적인 인물들이 많이 포진해 있던 상황에서 이런 경제적 기업들을 이용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경방도 민족주의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들이 일제 식민지 시절에 살아남아서 그리고 1930년대 넘어서 해방전까지 번영을 구가한데는 그만큼 식민지 정부와 관료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제공하는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편승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했을 것이다. 


1930년대가 되면서 경방이 고도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만주탈취와 중국 침략으로 인한 시장의 확장이었다. 경방은 처음부터 일본 제품과 경쟁하기 보다는 그 틈새 시장을 찾길 원했고, 초창기 어려웠던 시기를 넘기면서 만주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결국 일본 제품의 뛰어난 품질과 경영노하우와 경쟁하기 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려 좀 더 수월한 판로를 찾았고 때마침 일본의 전장 확장으로 인한 상승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민족기업으로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경방은 자신의 임노장자 착취에 대해서 소작농에 대한 착취와 같은 억압적 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쟁의는 철저하게 탄압 받았고, 임금은 최저 상태를 유지했으며, 노동자들은 계약기간동안 공장안에서 12시간의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경방은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때조차 노동자들에 대해 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고 일본 경찰들에게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혁 혹은 경제발전 시초는 한일관계 정상화다. 당장 급박한 자금과 자원을 지원받기 위한 이런 시도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으며, 살아남은 기업들은 과거의 시스템에 익숙하고 또 이를 복원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관계가 복원이 되고 물밑으로 흐르던 이들의 관계가 좀 더 적극적으로 표면적으로 들어나면서 이들은 예전의 시스템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복원의 한가운데 경방이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예전에 우의를 유지하던 기업과 인맥을 다시 되찾았고 손쉽게 안정적인 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시작한 경제발전은 일제시대 민족적 항쟁을 무마하기 위해서 총독부가 취했던 정책과 유사한 길을 걷게 된다. 부품과 자금, 주원료는 외부에서 조달하고 조립과 완성품 수출로 통한 성장을 유지하는 방향은 이미 경험했던 세계를 다시금 재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지원주체가 조금은 바뀌었지만 정부와 은행의 전폭적 지원 그리고 노동자의 희생을 통한 강요된 경제를 통해서 이익의 극대화한 기업. 이런 설명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가질수 있는게 저자가 의뢰한 연구에서 들어나듯이 재벌의 절반 이상이 창업자들이 일본식민지 시절의 기업운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경험이 이런 재벌을 형성하고 급격한 경제발전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히 다르지 않은 경로를 다시금 걷는 과정은 헐씬 수월했고 똑같은 문제들을 무시하고 그만큼 쉬운 길을 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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