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왕조사
김성원 지음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미얀마의 초창기 역사는 인도와 분리되어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다. 석기시대나 청동시대, 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분명 정착민들이 존재했지만, 왕조의 시작은 결국 인도인들이 넘오면서 시작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영토적으로 지리적으로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는것을 본다면 인도의 왕족이 미얀마 영토로 넘어와서 미얀마에 왕국을 세우고 역사를 시작한 부분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전 영토가 통일 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전체를 보기 보다는 이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얀마 역사에서 강력한 왕조의 출현은 현 태국의 왕조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치앙마이, 야유타야 왕국까지 내려왔으며 완전한 왕조의 붕괴를 초래할 정도였으며, 치앙마이나 야유타야는 미얀마의 왕국이 강성함으로써 속국 혹은 하나의 자치 주로써 숨을 죽이고 지내야했다. 이는 현 방콕에 샴왕조가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기 전까지 미얀마의 국력이 쇠퇴하기전까지의 역사 부분이다. 이로써 강성한 미얀마의 힘은 얼마나 그 범위가 넓었는지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미얀마 왕조가 근대로 들어오면서 서구 세력과 접촉하면서 내부 갈등뿐만 아니라 외부의 갈등도 해결해야되는 상황이 된다. 네덜란드와 포루투칼의 힘 겨루기를 통해서 미얀마에 진출할려는 외부 세력들은 미얀마의 반란 세력과 연합하기도 하고 미얀마 왕조에 용병과 무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포루투칼의 시대가 지나가고 프랑스와 영국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프랑스와 영국은 제국의 패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인도가 영국의 손에 떨어지고 그동안 미얀마와 끊임없이 접촉해오던 영국은 결국 미얀마에 무력을 사용하여 점령함으로써 마지막 힘을 발휘하던 미얀마를 하나의 인도 자치구로 만들고 만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 왕조의 부흥을 위해서 최신식 무기를 도입하고 제도를 개편하는 등 근대화의 열의가 있었지만 이미 그 시대는 영국에 기울고 있었다.


미얀마의 종교를 보면 인도와 스리랑카를 거쳐서 불교가 들어와 전통적인 낫 신앙을 대처한다. 하지만 민속신앙으로 낫 신앙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현재까지도 미얀마 전역에서 낫정령을 섬긴다. 미얀마 왕들은 불교 정화 운동과 국민 화합을 위한 불탑건설 내세를 위한 공덕을 위한 불탑 건설을 강행했다. 이 많은 파고다들은 전쟁시에 필요한 방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왕은 불교 승려의 조언을 얻어서 국사를 결정했고 그들의 영향력은 현재 군사정권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이 전통속에는 점을 치고 미래를 예언하는 승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외부에서 보기에 미신적으로 보이는 이 행위가 미얀마 왕조들이 수도를 정할 때 항상 중요시 했던 요소이고 이 예언이나 점성술에 의해서 수도가 바가에서 잉와로, 버고로 이동했다(현 군사정권도 양곤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이전할 때 이 점성술에 의존했다고 한다).


이 미얀마 왕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버마족과 소수 민족간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현재도 미얀마는 국민 화합과 융화라는 의미에서 버마족의 의미를 담고 있던 버마라는 국명에서 미얀마로 개명을 했지만, 역사적으로 샨족과 몬족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기회가 될 때마다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서 독립을 선언하고 투쟁을 계속했다. 이는 현대의 끝나지 않는 불화의 불씨의 연속선상으로 보인다. 특히 하부 미얀마에서 끊임없이 괴롭히던 몬족은 미얀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면 태국으로 망명을 했다가 기회가 되면 다시 미얀마로 되돌아와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또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상황에서 군내 정황이 불안해지면 바로 중국이 국경을 침범하고 미얀마를 위협했던 상황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누적되어 현재의 미얀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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