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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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독보적인 여성 서사를 보여주는 작가 강화길의 신작 『풀업』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을 통해 출간되었다. 어머니와 두 딸이 등장하는 여성 가족 서사가 그려지지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따뜻한 관계는 엄마 영애와 둘째 딸 미수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미수가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고, 그녀에게 기대는 영애 사이에서 첫째 딸 지수는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지수는
"대학을 재수해 들어갔고,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다 떨어졌으며, 당연한 수순을 밟듯 취직도 늦는"(10쪽) 사람으로, 전세 사기를 당하고 엄마 집에서 살게 되면서 가족간 갈등은 심화된다.

어느날 지수는 매일 운동하는 여자를 마주치고,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한다. 운동을 통해 지수는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며 주체성을 되찾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모습을 통해 그녀가 소외와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한층 더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말미에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풀업 운동을 시도하는 지수의 모습은 그녀의 성장과 이미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괄호를 통한 서술 방식이었다. 『풀업』에서는 괄호가 내가 지금껏 봤던 어느 소설보다 더 많이 쓰여졌는데, 이 괄호의 기능이 흥미로웠다. 괄호 안의 서술자는 상황 및 심리를 부연 설명해주며, 독자들이 지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마치 얘기를 들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첨언하는 느낌을 주어서 인상적이었다. 또한 세 모녀의 내밀한 감정선을 괄호를 통해 섬세하게 표현하여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졌다고 생각한다.

p. 69 운동을 배운 지 겨우 한 달 반이었지만, 지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 그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수의 몸이 변화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매일 새벽 지수를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건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삶의 다른 것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p. 83 다만 영애 씨는 짐작했던 것 같다. (그랬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미수가 그네를 높이 타는 걸 보면서 말이다. 저 애가 나의 자랑이 될 거라고. (나를 책임지게 될 거라고.) 그렇다면 지수는 뭐였을까. 겁이 많고 쉽게 포기하는 아이. 험악한 예언을 들어도 아무 말 못하는 아이. 뭐든 동생보다 부족한 아이. 대학도 취업도 모든 게 다 늦은 아이.

p. 89 지수는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지수는 시들어가는 식물이 아니었다. 설사, 시들어간다고 해도, 베란다 한구석에 계속 처박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 지수는 빛이 필요했다. 빛을 원했다.

p. 98 하지만 지수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한 삶. 빨래와 화장실 청소를 해주고, 생활비를 나누어 내고, 필요할 떄마다 곁에 있어주는 그런 사람과 함께 사는 삶 말고, 그냥 영애 씨와 지수의 삶. 엄마, 엄마는 나랑 사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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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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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였다. 그 당시의 자료를 통해 그 전쟁의 배경과 스탈린그라드 포위전에 관해 자세히 보았고,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최악의 전쟁, 독소전 한복판에서 저격병으로 지낸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 속 시골 마을에 살던 주인공 세라피마는 독일군에 의해 엄마와 마을 사람 전부를 잃는다. 그 후 그녀는 스승 이리나를 만나 저격병이 되어 자신의 복수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전장을 누빈다. 이 책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배경으로 소련 여성 저격수들의 삶과 더 나아가 전쟁에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독소전쟁의 실제적인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어 더욱 몰입감을 높였다. 또한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공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기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 연결되어 진실된 여성 서사를 그리고 있다.

책의 저자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고 전쟁 속 여성들의 비참함을 소설로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한다.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나왔듯이, 남자들과 똑같이 전쟁터에서 싸운 여성들은 전쟁중에는 무시받고, 전후에는 불편한 존재로서 소외된다. 이 소설은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 실감나면서도 마음 아픈 이야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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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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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 형태의 소설 6개를 모아 놓은 청소년 단편소설집이다. 전형적인 학교 괴담같은 소설, 보다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시킨 소설, 미묘한 첫사랑을 담아낸 소설 등 제각기 다른 분위기의 6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어, '이 중 너의 취향이 하나 쯤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소설 두 편은 권여름 작가의 『영고 1830』과 조진주 작가의 『그런 애』다.
『영고 1830』은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 주인공의 학업 스트레스에 관련한 이야기와 괴담이 합쳐져 생생하면서도 섬뜩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학교의 삭막함과 주인공의 괴로움이 선명하게 느껴져 더욱 몰입하면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애』는 배우 지망생인 '솔희'가 SNS에 노출 사진을 올리는 사실을 그녀의 절친인 '예나'가 알게 되며 진행되는 이야기다. 사실 괴담이라기 보다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지니의 구멍'에 관한 소문과 두 주인공의 우정을 연결시킨 따뜻한 청소년 소설이라고 생각이 들어 더욱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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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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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파란색 표지가 눈에 띄었고,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장대함에 놀랐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쓴 가상의 작품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중심으로 700여 년의 시간을 오가며 다섯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책은 다소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는 시간이 필요했다. 각기 다른 시간대의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 시대의 소외자들로, 그들이 '클라우드 쿠쿠랜드' 책을 만나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책의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의 유려한 문장과 아름다운 장면의 표현법이었는데, 단순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특유의 문체로 간결하지만 적확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스케일의 대서사시와 같은 소설이지만, 다채로운 내용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책을 읽는데 크게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 소개의 말에도 나와있듯이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오늘날 인류가 누리는 풍성한 문화의 기틀이 된 이야기(스토리텔링)와 책을 지켜 온 이름 없는 이들에게 바치는 찬가와도 같은 소설이자, 삶을 구원하는 문학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소설이다. 또한 뒷표지에 나와 있는 "이 책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서들에게 바칩니다."라는 문장이 이 책의 메시지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책과, 그 한 권의 책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용기에 관한 희망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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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
테일러 젠킨스 리드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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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서평단을 통해 처음 이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사실 처음에는 꽤 두껍다고 느꼈다. 최근 얇고 가벼운 책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500쪽이 넘는 장편 소설을 오랜만에 접해 '이걸 언제 다 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초반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두껍게 느껴졌던 책이 술술 넘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실화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사실 밴드의 존재부터 책의 모든 내용이 픽션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처음부터 전기 작가의 멘트와 함께 인물들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데이지 존스와 밴드 '더 식스'가 아티스트로서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시기에 따라 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실화같은 리얼함을 주어서, 더욱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캐릭터 묘사와 소설 속 상황들이 합쳐져 끝까지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데이지 존스'라는 인물은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당차고 엉뚱한 매력적인 여성이다.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똑바로 전달하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 직선대로를 질주하는 듯한 성격을 가진 '데이지 존스'는 음악에도 사랑에도 열정적이다. 비록 그녀가 약물에 중독되어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다 충동적으로 결혼을 한 장면에서는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여전히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밴드가 해체된 후에 그녀가 약을 끊고 인생을 개선해나가는 모습이 나왔을 때 드디어 졸였던 마음을 풀고, 편하게 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캐런 :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 온 세상이 남자들 세상이지만 음반 업계는......유독 여자에게 험해요. 손 하나 까딱하는 것도 남자들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까. ...... 하지만 데이지는 처음부터 그 두 길 모두 거부했어요. 그 친구의 길은 '날 받아들여, 아님 날 건드리지 마'였어요.

🎤빌리 : 누군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에너지를 줄 때, 누군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속이 들쑤실 때 - 데이지가 내게 그랬는데 - 그 에너지를 욕구로도 사랑으로도 미움으로도 바꿀 수 있어요. 난 데이지를 미워할 때 제일 마음이 편했어요. 미워하는 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감정이었어요.

🎤캐런 : 지금은 소울메이트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을뿐더러 찾아 나설 생각도 없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믿는다면 모든 면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나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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