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산동 문지아이들
유은실 지음, 오승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나는 재래시장에서 살았다. 군산시 명산동 명산 시장. 시장 초입에서 조금만 걸어들어오면 우리 가게가 나왔다. 시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있던 가게는 몇 번의 이사를 거쳐 결국 시장 초입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낳고 난 후, 정육점을 하고 있던 시숙 밑에서 일을 배워 나중에 따로 가게를 차리셨다고 했다. 첫 가게는 대명동 구 시장이었다. 내게는 아픈 기억이 많은 그곳.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나보다 큰 형들의 손에 끌려 물건을 훔치는 일을 강요받고, 수시로 협박당하고 맞기도 했던 두렵고 무서웠던 곳. 형들에 이끌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된 경암동 철로에서 놀다 손가락이 부분 절단되었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셨다. “그때는 내가 너희들을 제대로 돌볼 정신이 없었어.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위험하게 놀게 내 버려두면 안 됐었는데.”

그 뒤 우리 가족은 명산 시장으로 이사했고,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 그곳에서 무려 10년 넘게 장사를 하셨다. 가게 앞에는 화교 학교가 있었고, 화교 앞 담벼락 밑에는 좌판을 깔아놓고 각종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반찬과 국거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옆의 가게들에서 식재료와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와 점빵 아랫목에서 엄마와 이불을 덮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렸고, 출출할 때면 가게에 앉아 엄마가 연탄불에 구워주신 고기를 먹었다.

집중력이 부족하고, 유난히 말이 많았던 나는 “시장에 살아서 애가 좀 정신없고 시끄러운가 봐.”란 이야기를 주변 어른들로부터 종종 들었다. 그들의 해석은 쉽게 내 것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성장 환경이 그 사람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 수다스러움과 산만함의 이유를 재래시장에서 찾았다. 그 생각은 날 꼭 닮은 첫째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
‘이웃에 공장이 많으면 생활하기 어떨까?’란 질문에 은이는 1번 문항의 ‘매우 편리하다’라는 답을 적었다. 그러나 정답은 3번의 ‘시끄러워 살기가 나쁘다’였다. 은이는 고민했다. 공장이 많은 동네에 살면서 시끄럽다고 느낀 적도 없었고, 살기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살기 나쁜 동네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은이는 혼란스러웠다. 은이는 자기 동네가 공장 때문에 살기 좋은 여러 이유를 생각했다. 공장이 있어 이웃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엄마와 아빠가 있다. 그리고 여러 단추가 장식된 나만의 인형을 가질 수 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시험지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아빠의 말은 지금의 네 생각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고마운 어른의 당부였다. 공장이 있어 살기 나쁜 것이 아니라 공장이 있어 살기 좋은 것임을. 공장이 있는 동네가 살기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나쁜 것임을, 교과서 만드는 사람도, 선생님도 모르는 사실을 은이는 알고 있었다.

유은실 글, 오승민 그림의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사회과 고사’ 시험지를 간직하도록 도와주신 부모님 덕분에 작가는 이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변두리』,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만국기 소년』,『일수의 탄생』 등의 책을 읽으며 나는 유은실의 찐팬이 되었고, 작가의 다른 책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중심부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애정 어린 눈빛, 결핍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예리한 시선이 좋았다.

『나의 독산동』을 읽으며 나의 명산동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이전 재래시장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시장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시장은 놀이터였고, 닭집 애, 과일 집 애, 약재 집 애로 기억되는, 이제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내 친구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부모님, 동생들이 함께 살던 집이 거기에 있었다. 시장에 살면서 시끄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사람이 많다고 정신없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북적임과 떠들썩함은 내게 활기참과 생동감이었다.

아들과 온양 온천을 자주 갔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난 뒤면 어김없이 온천 옆 재래시장을 들러 떡볶이와 어묵을 먹었다. 시장 안 정육점 앞을 지날 때면 내 걸음 속도는 느려졌고, 친근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한 바퀴 시장을 돌고 나오며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는 시장에서 살아서 참 좋았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