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공존 - 일상과 그림에서 찾은 내 삶을 바꾸는 힘
최영배 지음 / 사람과사회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일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 『혼자서 공존』

 

혼자서 공존

-일상과 그림에서 찾은 내 삶을 바꾸는 힘

최영배 저 | 사람과사회 | 2019년 06월 20일

 

정익구 (사)한국코치협회 코치

 

최근 최영배가 쓴 수필집 『혼자서 공존』을 읽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책 제목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에 관한 것이다.

먼저, 내 상식으론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이다. ‘혼자서 공존’이라니. ‘공존’이란 누구 또는 무엇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혼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마치 ‘똑똑한 바보’와 같은 형용모순(Oxymoron) 어법을 당당히 책 제목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저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

책에 나와 있는 간단한 저자 소개만으로는 도무지 그를 유추해내기 어렵다. 무릇 글이란 그 사람의 생각과 정서를 담고 있는 법이다. 더욱이 에세이 형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에세이에는 아무래도 저자 삶의 경륜이 묻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에 들어온 ‘방문객’이다. 정현종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에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저자의 프로필을 써보았다. 추정컨대 그는 40대 중후반의 직장인이다. 고등학생 아들 하나가 있고, 서울에서 아파트에 살며, 주로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가끔 골프도 치고 여행도 하는 것으로 보아 흔히 말하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트렌드에도 민감하고 자기 계발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자는 그저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 책을 냈다. 그것도 에세이집이다.

 

책은 생각 훈련의 산물

 

그런데 나로서는 전혀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내 관점을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요즈음엔 책을 내는 직장인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직장인은 흔히 ‘회사 일로 시간이 없다’라거나 ‘그럴 만한 재주가 없다’라고 말한다. 단순히 핑계로만 여길 수는 없다. 사실이니까. 그런 점에서 저자를 크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생긴 일은 없다. 시도해야 결과가 있다. 인생은 어떤 리스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81쪽

 

저자는 자칫 스쳐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작은 사건이나 사물에서 남다른 발견을 하고 그것을 생각의 실마리로 삼는다. 생각은 희망, 행복, 인내, 자신감, 미래, 성장, 새로움과 같은 밝고 긍정적인 삶의 주제들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책이나 여행, 영화, 그림을 통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 책에서 인용한 책과 영화만 하더라도 엄청나다. 좋은 생각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평소에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아마도 저자 자신이 삶에서 늘 품고 있는 키워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hat’과 ‘why’와 ‘how’라는 삶의 세 가지 질문(215쪽) 가운데, ‘why’에 집중한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익숙하고 안전한 곳을 박차고 나와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 책은 그런 생각 훈련의 산물이다.

 

저자가 의도한 ‘혼자서 공존’이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면 ‘무엇’을 찾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일상에서 ‘왜’를 묻지 않으면 삶은 무감각하고 무감동하며 무의미해진다. 그럴 때 혼자가 된다. 이때의 혼자됨은 실존적 고독과는 다르다. 그것은 절망이고 비참함이다.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때의 허망함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도미노를 멈추게 하고 삶의 변곡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느낄 때(본문 12쪽) 희망과 ‘공존’하는 자신이 된다. 자신의 존재감도 잃어버리고 무기력에 익숙해져 있는 모리타니아 당나귀가 아니라 몽골초원의 능동적인 당나귀로 살 때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321쪽).

자유는 어떤 경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그런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틀을 깨고 변화하려는 시도는 바로 ‘왜’라는 물음의 결과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면서 깨어 있을 때, 일상의 삶도 비로소 소중한 의미로 되살아난다. 우리 일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살아 숨 쉬며 하나하나가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저자가 의도한 ‘혼자서 공존’이란 바로 이런 삶이 아닐까?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이 공존은 아니다. 자기 삶을 진정 의미 있게 하는 것이라면 공존 관계라 부를 만하다.

90편이 넘는 글에는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다. 감성도 있고 이성도 있다. 과거에서 기억과 관계를, 현재에는 행복을, 미래에는 변화를 가늠한다. 모두가 개인 삶과 직업인으로 사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특히 이름난 화가의 그림에서 영감과 생각 거리와 감성적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특징이다. 비교적 짧은 글들이라 마무리가 아쉬운 점도 더러 있지만 바쁜 현대인이 읽기에는 아주 매력적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다.’

-321쪽

 

지구별 여행자로서 나는 책 속의 이 구절을 오래 담아두고 싶다. 저자가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아마 그도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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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공존 - 일상과 그림에서 찾은 내 삶을 바꾸는 힘
최영배 지음 / 사람과사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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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봄날은 바로 ‘오늘’

-그의 글에는 온기와 눈물이 함께 있다

 

염규현 민화협 정책홍보팀 부국장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이미 사람이 온전히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질 않는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 자체가 이미 간고분투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단지 치열하다는 표현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눈물겹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은 공존이다. 이 무정한 세상에서 결코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때론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것. 이는 온전히 공전에서 비롯된다. 공존의 소중함과 힘을 아는 이는 이미 평범하면서도 평범한 이가 아닌 셈이다.

저자는 자세한 약력을 밝히지 않는다.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스스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결코 단순히 평범한 이는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또 어느 측면에서는 앞서 말한 진정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가능할 듯싶다. 그는 영민한 관찰력과 세심함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타자와 공감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매일 매일 공부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한다. 애써 자신을 바꾸려 하지는 않지만, 나태함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타자에 대한 애정이 가능하다. 4년 동안의 기록이라는 이 책은 말 그대로 ‘일상과 그림에서 찾은 내 삶을 바꾸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하고, 공존의 솜씨 역시 서툰 탓에 관계의 허기를, 미지의 영역에 대한 허기를 책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단 하나의 진실한 친구라도 있는지, 새삼 비관하게 되는 지금, 나는 무의식적으로 책에 모든 것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영화 속 ‘자파’는 악역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은 틀림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사랑이다. 고독사가 늘어가고 있는 오늘, 어미는 그럼에도 자식을 버릴 수 없다. 이미 몸과 마음이 떠난 자식이지만, 자신의 땀으로 인해 찌들어버린 육신처럼, 자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신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내 자식을 욕할 순 없다. 내 자식을 비난할 수 없다. 차라리 헛된 거짓이라도 필요하다. 내가 서러울지언정, 무참할지언정, 저 멀리에 있는 내 자식은 온전해야만 한다.

저자가 의도했는지 혹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책 곳곳에는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이야기마다 함께 담긴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눈물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만 같은 데도 별안간 울컥함이 다가온다. 글과 그림의 호흡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 아닐까. 늙은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식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사회와 타자에 대한 따뜻함까지. 그의 글에는 온기와 눈물이 함께 담겨져 있다. 그리곤 깨닫는다. 책의 제목이 말하는 ‘혼자서 공존’이라는 의미를.

책은 순간순간 페이지를 넘겨가며 속도를 내야 하는 것이 있는 반면, 이야기 하나하나 매일매일 아껴가며 읽고 싶은 것들이 있다. 이 책은 단연 후자가 될 것이다. 4년 동안의 기록을 하루 이틀 성의 없이 넘길 순 없다. 때문에 꽤 오랫동안 붙잡고 아껴가며 읽었다. 이야기마다 담긴 명화를 감상하는 재미 역시 결코 적지 않았다. 저자의 안목이 유감없이 발휘된 순간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독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누구도 자신을 끝까지 보듬어 줄 수 없다. 홀로 태어난 것처럼 홀로 죽어야 하는 존재가 우리다. 때문에 우리는 자존감과 이기심이 범벅이 된 채, 하루하루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공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듯, 끊임없이 서로를 보듬고 안아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저자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가 더더욱 평범한 이로서 이 세상의 따뜻함을 하나하나 갈무리해주길 바란다. 일독을 권하는 소중한 책이다.

* 이 서평은 필자가 계간 사람과사회에 기고한 글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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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공존 - 일상과 그림에서 찾은 내 삶을 바꾸는 힘
최영배 지음 / 사람과사회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일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 『혼자서 공존』


글 / 정익구


최근 최영배가 쓴 수필집 『혼자서 공존』을 읽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책 제목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에 관한 것이다.

먼저, 내 상식으론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이다. ‘혼자서 공존’이라니. ‘공존’이란 누구 또는 무엇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혼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마치 ‘똑똑한 바보’와 같은 형용모순(Oxymoron) 어법을 당당히 책 제목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저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

책에 나와 있는 간단한 저자 소개만으로는 도무지 그를 유추해내기 어렵다. 무릇 글이란 그 사람의 생각과 정서를 담고 있는 법이다. 더욱이 에세이 형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에세이에는 아무래도 저자 삶의 경륜이 묻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에 들어온 ‘방문객’이다. 정현종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에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저자의 프로필을 써보았다. 추정컨대 그는 40대 중후반의 직장인이다. 고등학생 아들 하나가 있고, 서울에서 아파트에 살며, 주로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가끔 골프도 치고 여행도 하는 것으로 보아 흔히 말하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트렌드에도 민감하고 자기 계발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자는 그저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 책을 냈다. 그것도 에세이집이다.


책은 생각 훈련의 산물


그런데 나로서는 전혀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내 관점을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요즈음엔 책을 내는 직장인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직장인은 흔히 ‘회사 일로 시간이 없다’라거나 ‘그럴 만한 재주가 없다’라고 말한다. 단순히 핑계로만 여길 수는 없다. 사실이니까. 그런 점에서 저자를 크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생긴 일은 없다. 시도해야 결과가 있다. 인생은 어떤 리스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81쪽


저자는 자칫 스쳐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작은 사건이나 사물에서 남다른 발견을 하고 그것을 생각의 실마리로 삼는다. 생각은 희망, 행복, 인내, 자신감, 미래, 성장, 새로움과 같은 밝고 긍정적인 삶의 주제들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책이나 여행, 영화, 그림을 통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 책에서 인용한 책과 영화만 하더라도 엄청나다. 좋은 생각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평소에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아마도 저자 자신이 삶에서 늘 품고 있는 키워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hat’과 ‘why’와 ‘how’라는 삶의 세 가지 질문(215쪽) 가운데, ‘why’에 집중한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익숙하고 안전한 곳을 박차고 나와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 책은 그런 생각 훈련의 산물이다.


저자가 의도한 ‘혼자서 공존’이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면 ‘무엇’을 찾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일상에서 ‘왜’를 묻지 않으면 삶은 무감각하고 무감동하며 무의미해진다. 그럴 때 혼자가 된다. 이때의 혼자됨은 실존적 고독과는 다르다. 그것은 절망이고 비참함이다.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때의 허망함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도미노를 멈추게 하고 삶의 변곡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느낄 때(본문 12쪽) 희망과 ‘공존’하는 자신이 된다. 자신의 존재감도 잃어버리고 무기력에 익숙해져 있는 모리타니아 당나귀가 아니라 몽골초원의 능동적인 당나귀로 살 때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321쪽).

자유는 어떤 경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그런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틀을 깨고 변화하려는 시도는 바로 ‘왜’라는 물음의 결과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면서 깨어 있을 때, 일상의 삶도 비로소 소중한 의미로 되살아난다. 우리 일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살아 숨 쉬며 하나하나가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저자가 의도한 ‘혼자서 공존’이란 바로 이런 삶이 아닐까?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이 공존은 아니다. 자기 삶을 진정 의미 있게 하는 것이라면 공존 관계라 부를 만하다.

90편이 넘는 글에는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다. 감성도 있고 이성도 있다. 과거에서 기억과 관계를, 현재에는 행복을, 미래에는 변화를 가늠한다. 모두가 개인 삶과 직업인으로 사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특히 이름난 화가의 그림에서 영감과 생각 거리와 감성적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특징이다. 비교적 짧은 글들이라 마무리가 아쉬운 점도 더러 있지만 바쁜 현대인이 읽기에는 아주 매력적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다.’

-321쪽


지구별 여행자로서 나는 책 속의 이 구절을 오래 담아두고 싶다. 저자가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아마 그도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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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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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단’과 ‘분노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

 

2019년 1월 30일

 

“극단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우리는 왜 극단적일까?”

극단의 개념, 특정한 곳의 극단, 우리 사회의 극단 등 세 가지 물음은 김태형 선생이 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을유문화사, 2019년 01월 20일)를 읽기 전이나 읽은 후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물음이다. 극단, 극단주의, 이분법 등은 자주 하는 표현이다. 매우 불행하게도, 이 표현은 우리 사회에 치우침, 맹목 등 바람직하지 않은 인식이 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불행한 사회적 인식의 창궐’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강력한 것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는 극단주의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을유문화사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곧장 신청한 이유는 책 제목 때문이었다. 극단주의가 무엇이고 극단적인 이유를 살펴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사회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극단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는 설명을 붙인 책이어서 서평단과 상관없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기대는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미국 중심의 심리학 이론이 한국 사회와 어울리지 않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 어울리는 미국 심리학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한국 사회는 안전과 안정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은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가치이자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자인 김태형 저자는 극단주의 특성을 ‘배타성’, ‘광신’, ‘강요’로 설명하고 여기에 ‘혐오’를 덧붙였다. 주목할 것은 극단주의는 우리 사회의 안정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 위협은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요인이다. 또한 지배층이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관심 있게 살펴야 할 대목이다.

저자는 극단을 설명하면서 집단극단화를 제시하다. 이는 신념, 감정, 성향을 중심으로 심리적 격리, 사회적 폭포 현상, 정보의 폭포 현상, 평판의 폭포 현상 등을 ‘설명의 장(場)’으로 끌어온다. 특히 집단극단화와 인터넷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최근 정치권을 비롯해 영상(유튜브)을 ‘주장의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집단극단화를 설명하는 대목, 이 부분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설명이 나온다. 저자 설명처럼, 집단극단화 현상은 단지 얼굴을 직접 맞대는 집단토론은 물론 인터넷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인터넷, 즉 ‘웹’과 ‘모바일’을 손쉽게 일상에서 접할 수 있게 되면서 편식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대폭 늘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맞는 기사만을 선택해서 읽는데, 이렇게 편향적으로 정보를 접하게 되면 극단화할 위험이 높아진다. (중략) 오프라인에 비해 온라인에서는 유유상종 집단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집단이 무수히 많은 동질적 집단으로 쪼개지는 극심한 '분화' 현상이 나타난다. 집단극단화 이론에 의하면 이런 수많은 동질적 집단들은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는데, 그 결과 집단극단화 현상이 발생한다.”

-114~115쪽

 

이 두 문단은 이 책 한 권을 가장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론이나 용어를 설명하고 한국에 퍼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예방법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위에 인용한 현상을 극복하거나 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극단과 극단주의, 혐오와 배타성을 없애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극단주의 예방과 없애기를 위해 ‘사회적 차원의 근본적인 대수술’을 제시했다. 그 중 정신적인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해 차별, 무시 현상인 학대 현상을 막기 위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극단의 문제는 격차를 넘어 정신적 차원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성이 크다. 이는 ‘교육’과 ‘문화’의 시선에서 접근하고 이와 잘 어울리는 방안이 필요하다. ‘배타성’, ‘광신’, ‘강요’, ‘혐오’가 극단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만큼 네 가지 현상이 일상에서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심한 경우 법에 의지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 방법으로 보기 어렵다.

저자는 인터넷이 극단을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인터넷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공감하고 동감한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순기능 대신 역기능을 악용할 때다. 저자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를 예로 들었듯이, 총기 자체는 죄가 없다. 총기를 쓰는 사람이 문제이고, 총기 사용 문화가 문제다. ‘병든 사회’와 ‘건강한 사회’의 차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 교육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판카지 미슈라의 책 제목인 『분노의 시대 : 현재의 역사』처럼 ‘분노의 시대’다. 분노해야 할 때와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일상에 깊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극단으로서의 ‘배타성’, ‘광신’, ‘강요’, ‘혐오’는 더 깊고 강한 사회적 독약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김태형 선생이 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분노의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와 설명을 제공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도 느꼈다. 저자는 린 데이비스 『극단주의에 맞서는 평화교육』, 캐스 R. 선스타인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알베르토 토스카노 『광신 :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 등 세 권을 많이 인용하고 참조했다. 세 권의 비중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은 다른 여러 권의 책이나 보고서 등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정보를 더 알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

극단이란 무엇인가?

http://www.peopleciety.com/archives/15209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맞는 기사만을 선택해서 읽는데, 이렇게 편향적으로 정보를 접하게 되면 극단화할 위험이 높아진다. (중략) 오프라인에 비해 온라인에서는 유유상종 집단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집단이 무수히 많은 동질적 집단으로 쪼개지는 극심한 ‘분화‘ 현상이 나타난다. 집단극단화 이론에 의하면 이런 수많은 동질적 집단들은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는데, 그 결과 집단극단화 현상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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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혼비 영영한 사전 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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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의견이지만, 지구상에 나온, 특히 한국에서는 가장 우수한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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