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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내게는 비극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작가의 전작인 <눈>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3부 구성을 사용했다. 가운데에 액자를 두고 앞뒤에 액자 바깥의 이야기를 두었다. 완전한 음악으로서의 오페라 작곡을 꿈꾸는 요하네스 카렐스키가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 에라스무스를 만나 검은 바이올린의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1부이다.
2부에서는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궁극의 명기로서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카를라 페렌치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훔쳐온 것이었다. 유혹하는 악마처럼 보이는 무례한 청년의 말에 발끈하면서 나온 그의 다음과 같은 선언은 이 소설이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는 걸 미리 말해주는 것만 같아 슬프다.
"카를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내가 당신 목소리를 소유하겠어요."
바이올린이 완성되고, 카를라는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결국 그의 잘못된 욕망이 카를라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까지 비극으로 만들고 말았음을 말해준다.
3부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죽음 이후, 남겨진 검은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연주를 해버린 요하네스가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를 완성하고도 카를라 페렌치처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악보를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분명 <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쌍을 이루는 두 인물의 삶, 혹은 사랑이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그러나 <눈>에서 두 번째 사랑은 첫 번째 사랑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방식으로 끝난 해피엔딩이었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훨씬 더 처절하고 음울하다. 왜일까.
자연의 빛으로서 3원색을 합치면 흰 색이 나오지만, 인간이 만든 물감으로 3원색을 합해서는 검은 색이 나온다. 검은 색은 심연이다. 니체 식으로 말해서 우리가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둠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작인 눈의 색은 희고, 이번 작품에서는 검은 색인 것 같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안의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아버린다. 누구라도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 심연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문학인 시에서는 얻을 수 있었던 흰 빛의 행복이,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작품에서는 검은 색의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이 다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학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음악에서는 실패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된다.
P. S.
에라스무스는 우리가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부르는 위대한 바이올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스트라디바리에게서 바이올린 만드는 법을 배운다. 크레모나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액자 속 이야기에서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 층위가 한 겹 더 생긴다고 본다. 아버지의 업적에 짓눌려 더이상 바이올린을 만들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이 작품 속에서 해피엔딩을 맞이한 사람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아들의 비극까지는 그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스타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중에서 진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게 아닌 악기들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