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5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15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소설 리뷰했던 것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 동네 아이들>이었다. 종교는 물론 그 가르침에 별로나 그다지가 아니라 전혀 관심이 없는 독자로서, 종교안에서의 '문학적'인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흡입력도 좋고 만약 종교사나 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더욱 재미있었을 책이다. 요즘 융합형 인재라고해서 다양한 학문분야의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곤 하는데, 나는 제대로된 융합이란 <우리 동네 아이들>과 같은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여러 범주의 지식을 많이 쌓은 것이 융합형이 아니라, 기본적인 틀을 갖추고 다양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지식 수준이 얼마가 되었든 핵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여러가지 학문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 이 때 발현되는 것이 창의성이고 상상력이며 이는 곧 인간 삶에 대한 충분한 사유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5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우리 동네 아이들>
-<금요일엔 돌아오렴>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용감한 친구들>

-<책이 좀 많습니다>


그 동안 좋은 책 읽고 리뷰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고 또 기뻤습니다. 다음 기회가 또 주어지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제목을 무엇으로 해야 할 지 많이 고민했다. 필립 로스가 소설에서 주로 다루는 소재는 죽음인데, 여기에서는 죽음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무모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할 수는 없는, 우연한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구원에 관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책임과 불행,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말을 '우연'으로 함축하고 책임과 죄책감과 자괴감, 무력감, 사죄와 같은 것을 '구원'으로 압축했다. 두 단어는 발랄하고 긍정적인 의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의 몇몇 사건이 생각났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 '아이들'과 '전염병'의 조합은 두 사건(사고)를 떠오르게 하는 데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들이 떼로 죽어간 세월호에 대하여서는 단순히 '사고'가 아니었단 가능성들이 제기되면서 보다 세부적인 절차를 거쳐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 이를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소설 속 아이들에게 닥친 불행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때, 다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짚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은 잔인한 것이라는 것. 우연 그 자체가 잔인하기도 하지만 '우연'이라는 무책임한 말 속에 담긴 책임 회피는 더욱 잔인하고 모진 것임을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보며 지속적으로 떠올려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소설에서의 우연은 작위적이고 조작된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전염에 의한 비극이다. 자, 이 쯤에서 메르스도 언급해보기로 하자. 실상 전염의 비극이란 결코 인간 책임의 범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발병의 근원을 찾아서 빠르게 차단하고 조치했다면 최소한 전염의 범위가 넓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르스의 경우 이 지점에서 늑장대응이 제대로 작용한 경우라서 필요 이상의 희생과 불안을 자아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폴리오도 비슷하다. 발병의 원인이나 감염 경로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메르스보다 더 위험하기까지하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폴리오가 매해 찾아오는 전염병이고 구체적인 치료방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한 정보는 누구나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전염병에 대처하는 당국과 사람들의 자세라기 보다는 개인의 죄책감과 고뇌이기 때문에, 실제로 방역작업이 얼마나 제대로 행해졌는가를 알 수는 없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이 다뤄 볼만 한 것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이다.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당국의 신속하고 철저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너져가는 인간과 그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필립 로스는 메르스와 <페스트> 그 중간 즈음에 있다고 생각된다. 보다 근원적인 내면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인물의 고뇌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고 느낄만큼이나 우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염병의 숙주이자 발원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마치 자신이 아이들을 죽인 것과 같은 그의 죄감은, 그가 가진 선량하고 따뜻한 마음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도 그가 전염의 근원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주지 않는다. 그가 인디언 힐에서 폴리오 환자가 생겨난 것을 보고 경악했을 것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적으로 숙주로 확인될 수 있는 무엇도 검사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다. 자신이 숙주이든 아니든 뉴어크를 떠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같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들의 '그 떄'의 고통에 있는 힘껏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가 인디언 힐에 오기로 선택하고 후회하고 결국에 마샤를 실망시키고 자신의 인생을 마치 실패한 자의 것처럼 방치한 것은 어째서인가? 인간은 너무나 거만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약하다. 객관적이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승복할 줄을 모른다. 자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에 그것에 거리를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나 적게 생각하고 있다. 폴리오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면, 버키의 삶은 자신 스스로 망쳐버린 자의적 비극은 아닐까.


버키, 너는 늘 이런 식이었어. 넌 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지를 못해. 한 번도!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한국이 싫어서>>라고는 하지만 이 책은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이 맞는 것 같다. 한국을 옹호하려거나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글쓴이가 소설에서 충분히 문제삼고 있는 쳇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경쟁, 입시, 취업, 결혼, 노후대책의 굴레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굴레에 뛰어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도 비난하거나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러한 삶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모순이 그 삶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분명 구조적인 모순이 있고, 또 그럼에도 그것에 뛰어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러한 한국에 적응하지 못한다. 호주로의 이민은 도피성으로 시작된 것이 맞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창 커리어를 다져야 할 시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호주행을 결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인물과 인물의 행동에 괴리감을 느꼈는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한국에서 못해먹겠다 싶더라도 외국 이민행을 쉽게 결정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주인공의 친구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주, 매월, 매년 반복하는 시어머니와 직장상사 흉을 보며 견디고 버티는 삶을 선택한다. 물론 도전적인 사람들만 이민을 생각하고 준비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도 살았는데 외국에서, 하다못해 복지 잘 되어 있기로 유명한 호주같은 곳에 맨땅에 헤딩한다고 해도 못 살겠는가? 그렇지만 한국에서 살던 일반인, 특히 주인공과 같은 소시민이 그러한 선택을 한다는 설정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우선 첫째로 열악한 가정환경, 한국 안에서 첫째 딸에게 부과하는 가족간의 심적, 물리적 부담감은 상당하다. 물론 반드시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고 그 부담에서 뛰쳐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안정적인 직업, 커리어나 그런 것보다도 우선 일정한 금액을 다달이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직장에 3여 년 다닌 맏딸이라는 설정에서 급작스러운 호주행은 무리가 있다. 많은 나라 중에 '호주'를 선택한 것과 이민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수집이나 선택과정이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주인공 스스로도 한국은 어떠한 나라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그 곳에 적응을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삼고 있으면서도 은근하게 그 안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냉소하고 있다.

소설에서 종합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점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이었다면 나는 많은 부분 실패했다고 본다. 실제로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제목을 굳이 <한국이 싫어서>라고 지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과, 호주이민 생활총서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이 '한국이 싫어서' 떠난 호주로의 이민인 것인가? 장강명이 소설에서 담아내려고 한 것이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싫다는 이유로 호주이민을 선택한 한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이 사회에서 어떠한 부조리를 겪었는지를 보여주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문의 초점이 미묘하게 비껴있다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한국과 외국, 남는 것과 떠나는 것의 이분법적 문제를 떠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꽤나 강단있는 제목이나 소재를 사용했으나 아쉬운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생의 충동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것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음을 절감할 때이다.

전쟁은 이러한 점에서 살아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나 영화 <KILL YOUR DARLINGS>과 마찬가지로, 역동하는 삶은 그것이 찰나인 것임을 알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며 과거나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NOW HERE)을 살 때 가능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 작품의 저변에는 전쟁의 비극이 깔려있다. 전쟁터로 나가는 몇몇 인물들은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금 여기를 살기 위해서 자행한 것이다(물론 킬 유어 달링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해군으로 가는 것은 도피성의 성격이 강하며,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THE NEW VISION의 형태가 '지금 여기'를 사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프랑스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락큰롤이 막 들어와 대중문화계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알제리가 독립했다. 알제리 독립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찬반으로 나뉘어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냉전체제에 들어섬에 따라 좌익과 우익의 대립 혹은 그 경계가 뚜렷했다. 소위 '선 긋기'는 다른 한 쪽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전제하지 않는 이상 그 색채를 뚜렷하게 해 준다. 마치 전쟁의 극단에서, 즉 죽음 앞에서 삶이 강렬해지는 것과 같다. 다른 이념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 또한 뚜렷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여러가지로 색채가 형형한, 뚜렷하고 다채로운 그림같다. 아름답고 강렬하고 그리고 온건하다.

작가가 알제리 사람이라는 점도 인상 깊은 자료이기는 하지만 그가 하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해서 그의 인생에 걸친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데에 더 주목하고 싶다. 왜 하필 문학인가를 묻는 작업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과 같다. 문학은 공상이나 공상만은 아니며, 환상이나 환상만은 아니다. 현실이나 현실인 것만은 아니고 현실에 있음직한 일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짧게 말해 문학은 인간에 대한 은유적 고찰이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라고 직접 단언하지 않고 비유적 세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곧 문학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의 모티프에서 유일하게 사실인 부분은 사르트르와 케셀이 마주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둘러싼 미셸의 삶과 그 주변의 삶,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간과 공간, 곧 역사는 현실이되 미셸이라는 비유적 세계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작가가 약 1000페이지에 걸친 방대한 양에 미셸로 대변되는 자신의 삶을 녹여내는 작업은 삶 그 자체의 본질적인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닐까. 죽음이 극화 되어있을 때 삶이 극화되듯, 거짓이 만연할 때 진실이 떠오르듯, 인간적 진실에 대한 비유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방대한 내용과 그 안에 많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 모두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변명 하에 여기에서 다 설명하고 싶지 않다. 다만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이 책이야말로 솔직한,그리고 아름다운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것은 편견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회권력과 인권에 관한 이야기이며, 왜 진실은 수많은 의혹으로 뒤덮혀 있는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이다. 진실 자체보다 '진실됨'의 이미지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이 곧 진실이자 정의가 되는 법정의 이야기이다. 혹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종류의 것이 있다는 것과 많은 예외들로 이루어진 작은 두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증거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믿음으로만 증거할 수 있으며 증거될 수 있는, 그리고 영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서, 조지, 가끔 켐벨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챕터가 번갈아 등장한다. 아서의 어린 시절과 조지의 어린시절, 그리고 그들이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 각각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까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혹시나 해서 두꺼운 책을 후루룩 넘겨보니 아서, 조지, 아서, 조지... 설마 이렇게 끝까지 가나? 나중에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나 하는 희망과 뜨악한 기분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갔다.

이 소설은 영화같다. 플롯을 재미있게 설정했다. 영화식으로 하자면 몽타주가 기법의 전부로 구성되어 있는 흥미로운 구성을 갖추고 있다. 아서와 조지를 교차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1권의 약 1/5가량 지점에서 그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셜록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과 사무변호사 조지 에들지였던 것이다.

이 책을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 약 두 시간 반 가량 되는 시간 중 30분정도가 그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할애되고, 신속하게 그들의 정체를 짠 하고 드러내는게 매력적이다. 이후 조지 에들지가 말과 소, 양 등의 가축 상해 및 도살혐의로 누명을 쓰고 유죄선고를 받기까지 스토리는 신속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아서는 곧 조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은 만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서가 조지의 혐의 벗겨주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특히나 스릴감넘치기로 유명한데, 나는 이 책에서 그 진가를 보았다고 말 할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스릴감이나 흥미로움을 넘어서 줄리언 반스는 그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극적이지만은 않은 문학적인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플롯이 그러하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의 형상화가 그러하다.

~의 실화이다,라고 끝맺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구축하고 있다. 그 중 몇가지를 간단하게 언급해보려고 한다. 1. 법과 정의, 진실 2. 사랑과 인류애와 예외의 승리

 

1. 법과 정의 , 진실

조지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법과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인간이 나고 법이 생겼으니 법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최소한 인간다운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고 구조이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법은 진실의 편에 서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아이러니하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만든 법이 진실일 수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검찰측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변호 측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범인을 무고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핵심은 그것이다 '만드는 것'. 조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도 '진실인 것같은 이미지'인 듯하다. 검찰과 변호사는 물론 각각이 내세우는 진실을 향해 각자를 증명하고 변론하기 바쁘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진실은 '진실인 듯한 이미지'에 가깝다. 조지는 자신의 부친이 파르시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조금 비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제 3자가 보았을 때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만다. 조금만 논리적인 추리를 가동한다면 사람의 인간됨됨이를 떠나서 행적 파악 등이 가능했을텐데, 공교롭게도 그를 수사한 경관은 조지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 대한 혐의를 두고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는데, 누군가를 범인으로 낙인찍고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 역시 일개 인간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이기때문에 편견에 사로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가? 켐벨은 명확한 증거없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나 편견만으로 그를 이미 범인으로 낙인찍고 그와 관련된 증거들을 모았을 뿐이다. 그로 인해 조지의 몇 년의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갔고 출소 후의 인생 역시 부차적인, 그러나 결정적인 사회의 편견 때문에 망쳐지고 말았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관계들을 망쳐놓을지도 모르는 수사관의 '선택'이 지나치게 이상화되고 권위를 얻은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법은 무엇이며 진실은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 역시 '인간'일진대 그들을 법의 제도 속에 올려놓는 또 다른 절차는 얼마나 엄격하고 객관적인가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실은 없는 것일까? 진실은 언제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2. 사랑과 인류애와 예외의 승리

아서의 경우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서가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아내와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진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쉽게 생각하면 불륜이지만, 튜이(아내)와 자식들을 제외하고 대개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승인해 준 이들의 관계를 그렇게 단정지어버릴 수 있는 걸까? 정신적인 사랑은 참 애매하고 모호한 말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어떤 관계가 사회적인 제도 안에 놓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위치가 불안정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제도 속에 익숙해져있는 우리가 가지는 편견이다. 제도는 우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조지의 경우에서 제대로 짚어냈다면, 아서의 이러한 사랑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삶의 부분인 것이지 제도적으로 판단할 일은 못된다. 아서는 튜이에게도 헌신적이고 진에게도 예의바른, 사랑을 감당하고 있었다. 튜이는 병으로 죽고 말지만, 그때까지 약 20여년간 아서는 그녀와 함께 했으며, 동시에 진 과는 9년여간을 함께했다. 그가 튜이의 병사 이후 진을 바로 새 아내로 맞이했다면 이는 오히려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플라토닉하지는 않았음을 반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된다. 튜이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며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튜이의 명예를 위해서 진과의 다른 관계를 모색할 수도, 튜이와의 다른 관계를 모색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선택과 책임으로 가득 찬 삶을 감당하고자 했던 시도만으로도 나는 아서를 높게 평가한다. 누구도 비극적이게 만들지 않고, 그녀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책임을 지고자 한 아서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와 편견과 고정관념이 사회의 '일반'이라면 그 큰 갈래에서 벗어난 나머지는 모두다 예외가 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일반이나 당연의 체계를 부수고 차라리 예외만이 존재하는 선택지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역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예외에 불과하다. 진실에 대한 의혹이, 곧 추잡하고 얼룩진 길을 걸어왔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삶을 구원하는 것, 이러한 사례는 단순히 많지 않기 때문에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의 초점에서 쓰인 예외와 예외만이 모인 갈래에서 예외는 의미가 다르다.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예외,라는 말 속에는 조지와 파르시와 주변 인물들의 몇 년간의 생애와 그 사건이 앞으로의 삶에 미칠 부차적이지만 난폭한 폭력이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외 속의 예외라면, 결국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 인류애로 하여금 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면부지였던 아서가 조지의 혐의를 벗겨주는 데에는 동정이나 연민, 또는 플라토닉, 혹은 무어라 명명할 수없는 다른 인류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예외에서 진실과 사랑과 그리고 인간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보다 본질적인 가치,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와 관념들이 어느새 인간을 잡아먹고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목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별달리 반응하지 않는 것은 '당연'의 세계에 대한 무감각적 수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 그것은 단번에 얻어지지 않는다. 결코 쉽지 않으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인간적 가치를 위할 수 있다는 점을 줄리언반스는 문학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증거는 대개 행위에 달려 있어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튜이하고 지긋지긋한 점은, 우리가 증거가 행위하지 않는 데 달려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사랑은 이 세계와는 따로 떨어져 있고, 알려지지도 않았어요. 이 세상이 볼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사랑이죠. 하지만 제게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뚜렷하게 잘 보여요.

조지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열정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서명이 보이더라도 결국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관료들의 반응 역시 바뀔 이유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