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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평점 :
근현대 미국 문학의 대표
#버너자매 #이디스워튼 #도서제공
세계 문학 전집 시리즈를 틈만 나면 사서 소장할 정도로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그 시대의 흐름을 글로서 접하는 것이 낯설기도, 세계 문학이다 보니 낯선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이 그토록 신이 나던 때였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의 나는 테스, 제인 에어, 작은 아씨들 등의 문학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로 그려지는 여성들의 모습이 당연하다가도 그것이 현 시대에서도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낀다.
『버너 자매』에는 총 세 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려 있다. 표제작 『버너 자매』를 시작으로,『징구』,『로마열』 순으로 삶의 이면과 개인의 모순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버너 자매』가 가장 길기도 하고, 읽은 후의 여운이 깊어 쉽게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녀들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늘 불안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고 설마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허탈함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하기에 어김없이 진솔하게 서평을 작성해 보려고 한다.
버너 자매
뉴욕의 뒷골목, 소박한 소품 가게를 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버너 자매는 일상에서의 소소한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소녀들이었다. 동생 에블리나의 생일선물로 시계를 준비한 앤 엘리자는 시계공 허먼 래미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시계공은 그녀들의 삶을 180도 바꿔 놓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유익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인생의 선물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물이 그녀가 양보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핍을 사랑으로 채우고 싶은 욕망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조로웠던 버너 자매의 삶이 래미로 인해 망가지는 것을 보며, 서서히 찾아온 비극과 그들에게 찾아온 변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지 알 수 없었다. 앤 엘리자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그녀의 상황에 더욱 이입하였는데,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몇 번이나 마주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습이 대단했다. 두 자매의 삶이 각각 인간 본성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에, 자매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든 물질주의적 세태가 원망스러웠다.
징구
문화 생활을 추구하며 만든 독서 모임에서 은연히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한 사람은 로비 부인으로, 그토록 무시하던 로비 부인으로 인해 독서 모임의 분위기는 180도 바뀐다.
또다시 고통스러운 침묵이 흘렀고, 클럽의 회원 각자는 다른 회원들이 비참하리만큼 무능하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오직 로비 부인만 천연덕스럽게 샤르트뢰즈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들이 좇는 허영의 끝이 단편의 결말에도 잘 드러난다. 귀족들은 징구가 무엇인지 끝끝내 알지 못한다. 로비 부인을 모임에서 제외시키는 것으로 그들의 모임이 지속될 수 없으리란걸 분명 그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단지 ‘독서 모임’의 타이틀만을 지키기 위한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능한 개인이 모여 발휘하는 집단의 힘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로마열
우아하고 고고해보이는 두 중년 부인이 식사 후 대화를 통해 서로를 향해 품고있던 은연 중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서로에게 숨겨온 비밀이 밝혀지고,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난다.
뭐, 여자애들은 가끔 좀 잔인할 때가 있잖아? 특히 사랑에 빠지면. 그날 난 네가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다리면서, 사람들 눈을 피해 서성이고, 소리에 집중하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저녁 내내 웃었던 기억이 나.
차근차근 쌓이는 대화 속 긴장감이 고조된다. 결말부에서는 그러한 긴장이 터져버린다. 한 남자를 두고 서로를 속이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두 부인의 관계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솔직하다. 어떤 소유욕이나 쟁취욕으로 인해 서로를 바닥으로 끌어내려는 모습 또한 인간적이라 오히려 그들을 보며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세 작품이 모두 몰입도가 좋은데, 작품 속에서의 인물들은 누구나 가질 법한 욕망을 품고 있다. 징구와 로마열은 당대 귀족들이 품고 있던 허례허식을 단적으로 그리고 버너 자매는 사회적 약자가 가난과 타락 속에서 겪어야만 하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사실 읽으면서는(물론 여느 고전을 읽어도 그렇다) 지금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적시하고 현실을 관통하는 이 소설이 미국 문학의 대표로 그려지는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쯤에서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24년간 출간의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각 계층의 여성들의 삶을 낱낱히 보여주는 이 소설이 부적절하다는 평을 받은 것은 단지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만은 아니다. 좋은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곧 좋은 부인이자 좋은 엄마로, 현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상과 약간은 달랐던 때에 현실과 소설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사회 세태를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작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사회 하층민으로서 여성의 삶을 적어내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오랜 시간 뿌리내린 부조리를 지적하고 누군가의 생애와 그들을 위한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더욱 존경심을 표한다. 이제야 세상에 나온 이 작품 역시 멀리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