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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표지부터 싱그럽다! 여름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토록 싱그러운 선물이라니. 아직도 "엄마! 엄마!" 불러대는 초등학교 6학년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것 같은) 딸 덕분에 이 재밌는 책을 3일이나 걸려 읽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중간부터 끝까지 쭉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덮고 나니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은 또 한 사람이 생각난다. 여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언니에게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
나리와 수미의 관계는 이상하고 친밀했다. 결혼 후 아이를 낳아 나리가 마주하게 된,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한 여자들의 세계'에서 만난 수미. "수미가 무언가를 더는 견디지 않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나도 내가 있는 곳을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치워두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그만큼 수미와 서하는 나와 은채의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87쪽)
2020년 코로나19가 창궐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나리의 일상, 그리고 그런 나리를 통해 보게 되는 수미의 일상이 가깝고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나리와 수미의 대화에서는 항상 뭔지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수미 모녀(수미와 서하)의 관계도 나리의 관찰을 통해 보여지는데 비슷한 또래의 딸아이가 있는 나는 그 부분 또한 내내 긴장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코로나의 여름 대유행이 지나가고 어느 가을, 나리와 수미는 함께 여안으로 향한다.. 만조아줌마를 만나러.. 만조아줌마 얘기가 나올 때 마다 난 너무 재밌고 비로소 마음을 놓으며 읽었는데, 촌철살인 그녀의 말들은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진짜 만조아줌마의 목소리가 되어 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딴산'의 사람들과 만조아줌마.. 혹은 '딴산'의 만조아줌마.. 행동하는 농촌 여자로 살아온 만조아줌마. '움직여서 뭔가를 실제로 이뤄내는' 만조아줌마. 그런 만조아줌마와 일주일에 하루를 보냈던 나리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 그것을 겪어보지도 못한 나인데 어쩐지 그 장면들이 애틋하고 그립게 느껴졌다.
그 여안에 갔을 때 수미가 만조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이나리 어린이에게 쓰이고 또 쓰이던 만조아줌마의 마음.. 나리는 좋았겠다. 만조아줌마 같은 아줌마가 있어서. 나리도 서하에게 그런 아줌마가 될 수 있겠지. 언제까지고 나리 공방 문을 열어둘 테니까.
익숙한 일상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 면적이 점점 좁아지는 신문지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던 우리의 2020년. 담담하게 그 시간을 통과해내던 나리. 나리는 수미 모녀를 보면서 그들이 '둘만의 고립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서로를 의식'했다는 것이 고마웠다고 한다. 수미네 모녀 뿐이 아니었겠지. 나리 자신도 그랬을거다. 그리고 우리 독자들도 그랬을거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벅찬 마음으로 <마주>를 읽었지..
* 덧붙임: 그들이 여안에 갔을 때 비탈 사과밭에서 사과 꼭지를 접고 수미가 사과를 먹는 장면을 읽던 어젯밤, 나는 얼른 사과를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배송된 사과를 씻어 맛있게 먹어보았다. 수미처럼..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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