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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평점 :
저는 동네의 작은 교습소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에게 단어시험을 보던 때, 중3 아이 하나가
democracy의 반의어로 autocracy라고 답을 적은
것을 보고 아이가 이 말이 무언인지 알고 적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autocracy’가 무슨 뜻인지 아니?”
“민주주의의 반댓말이요.”
“그래. 맞아. 그게 뭘까?”
아이는 한참 고민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받은 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숙제로 내어준 단어장을 달달 외우기만 했지 그 뜻을 깊이 파악하고 오지는 못했던 겁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얼마지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답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공산주의요.”
2023년의 아이들도 ‘민주주의’의 반말이 ‘공산주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중학교에서 배우는 정치 과목에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공부는 그저 특징을 나열하고 외우는 식이어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객관식
문제를 맞추는 데는 유용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른 정치 체제와 비교해서 그 본질을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아이가 ‘민주주의’의 반대말을 ‘공산주의’라고
이해한 맥락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대화를 통해서 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가족 어른들이 묘사하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협한 원흉인 공산당을 나쁜 적 이자 반의어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의 반대가 무어냐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공산주의’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겠죠.
아이에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의
반대말은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정치인 독재’라고
갈무리하고 대화는 끝났습니다. 아이와의 대화는 저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21세기는 그저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세상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실마리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다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상식으로 보면 사실, 너무나 당연한 걸 말입니다.
정아은 작가님의 이번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를 답해주는 책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전두환은 수의 차림으로 재판장에서 서있던 신문 1면의
사진이나, 사면이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통해서, 그리고 장례식
전경을 통해 뉴스에서나 보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권선징악이나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습니다. 하지만 정아은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여온 인간 사이의 결과물임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련되어 제가 들었던 그 뉴스들은 사실 전두환 개인이 아닌 한국인의 선택과 이해관계의 결과였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책이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그래서 제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까워올수록, 지금의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통찰들이 더욱 눈에 띄었습니다. 그
중 첫번째는 한국 현대사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과도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의 역할과 인물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 야당 대표 시절에 97년 IMF를 막을
수 있던 가장 마지막 기회였던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반대했던 이야기, 전두환 사면을 통해 지역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아이러니한 결단 등등, 정 작가님의 다면적 해석을 통해 정치의 생리와 인간을 이해하는
통찰이 깊게 다가왔습니다. 두번째는 IMF와 세계화를 겪으면
한국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IMF 시대를 겪으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던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동구권 세계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될 수록 한국이 더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최전선 국가로서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기에
미국이 가차없이 외면했던 점, 중국과의 수교 이후 대중국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의 부가
상승했다는 점을 짚어주는 맥락도 그 시절을 살았던 저와 주변인들의 삶의 특징을 많이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세번째로
민주주의 자체의 생리에 대한 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민주화가 발달될수록 다수가 권력을 가진 사회에서
개인은 원자화되고 더욱 자본주의화되는 반면 공공을 위한 정치활동과 역량은 모여지기 어렵다는 해석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지방자치문화가 그 대안이 되어야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러한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 긴장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개인마다 더 깊은 외로움을 품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먹고 살 길의 막막함을 달랠 길을
찾아 전전긍긍하며 미래를 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지금보다 나았던 시절로 보이는 과거를 향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호시절의 조각들 안에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저에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한 사진이 있습니다. 전두환의 장례식장에서
허름하고 낡은 군복을 입은 채 거수 경례를 하며 예를 다하던 한 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행동의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삶을 오래 살수록 더 깊이
알아가는 게 인생일 줄 알았는데, 알다 가도 모를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더 통렬하게 하게
됩니다. 그 노 군인과 저는 결코 비슷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이 책을 읽고 난 후 제가 품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 작가님에게 이번 책에서 도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