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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에 가고 싶다
이재호 지음, 김태식 사진 / CPN(씨피엔) / 2017년 12월
평점 :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도 해가 바뀌고 3월이 되니 파릇한 봄 기운이 올라온다. 화창한 햇살과 함께 살랑대는 봄바람이 어루만지면 앙상한 가지 끝에서 숨 죽이고 지냈던 봄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북상하면서 봄꽃의 개화 소식이 들려온다. 때맞춰 '화엄사에 가고 싶다' 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책의 앞표지는 여백의 미가 주는 여운을 살리고 있다. 제목, 지은이 아래 작은 풍경 하나가 달랑 매달려 있다. 절에 가면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미세한 바람결에 따라 일렁이면서 은은한 종소리를 울린다. 고즈넉한 산사가 풍경 소리로 활기를 띤다. 화엄사에 가면 풍경을 볼 수 있겠지.
책의 뒷표지에 추천사가 있다. 소설가 이재호가 시집을 낸다고 하니 어설퍼 보였다. 그런데 그의 시를 가만히 마주하고 보니 그것은 또 다른 재미있고 아름다운 쉼표로 다가온다.
작가는 굳이 형식을 따져가면서 글을 쓰지 않는다. 작가의 순간적인 감정을 몇 줄에 불과할지라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시일 수도 있고 에세이일 수도 있다.
저자 이재호는 희곡 '세익스피어 바로알기'를 시작으로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그런 그가 한동안 여행과 술에 심취해서 전국을 떠돌다가 문득 여행지에서 만난 민족의 자산과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김태식은 순전히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일컬어 막사진이라고 부른다. 이재호의 시는 김태식의 사진과 만나서 '화엄사에 가고 싶다' 라는 시집으로 탄생했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절간에서 잠깐 사진을 찍듯이 시를 써 내려갔다. 시의 깊이가 없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시를 자꾸만 수정하면 처음 맛이 떨어지니 거침없이 쓰는 방식을 택하노라고 한다.
시를 쓰는 데 정해진 수순은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긁적이면 된다. 그게 마땅찮으면 여러 번 퇴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어지는 것이다. 시에 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챕터를 보면 10개의 소제목으로 뭉뚱그렸다. 챕터의 소제목을 두 눈으로 훑기만 해도 시인의 거니는 발자취와 머무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책에 수록된 모든 시를 인용할 수 없다. 책장을 넘기면서 싯구를 음미하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속세를 초월한 듯 맑은 시심이 전해진다.
<1. 절간 그리고 쉼표를 이야기하다>
시인의 발걸음이 머물렀던 절에서의 시심을 풀어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불교를 적극 장려했기에 전국에 수많은 사찰들이 남아 있다.
화엄사에서 마곡사, 미황사, 광덕사, 옥천사, 남한 성불사, 대비사, 용문사, 성륜사, 내소사, 회암사, 일월사, 연곡사, 간월암, 보타사, 현등사, 남양주 보광사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절이란 절은 다 찾아다녔나 보다.
그동안 알고 있는 절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 많은 절들은 세월 속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지금에 이르렀다. 따라서 절에 머무는 시인의 마음도 달라진다. '간월암을 지나며'를 읽어볼까?
간월암을 지나며
바람의 뼛골 잡아 흔드는 간월암
세월보다 서러운 달빛 차오르면
청파의 고운결 타고 그리움 출렁
육백년 해송 고독함에 눈물 멎네
대부분의 암자는 절보다 작아서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스님이 기거하면서 도를 닦는다. 그런 암자에 접어들면 사람들이 드나드는 절과는 다른 적막감에 휩싸인다. 어둑해진 밤하늘의 달빛과 해송에 그리움을 의지해 본들 사무치는 고독감을 이길 수 있으랴.
<2. 그리움, 그 진함을 색칠하다>
그리움의 대상은 누구일까? 그리움이 겹겹이 덧칠하듯 그 농도가 진해져 간다. 계절이 주는 상념과 자연 현상이 맞물려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노을'을 읽어볼까?
노을
저 노을 속 타들어 가리라
한점도 소유를 버린 채 우주의 미물되어 사라지리라
가슴속 그리 뜨겁던 유희의 날
사랑 탐하다 사라진 별자리 향해 타들어 가리라
아, 장렬하라. 한 줄에도 지지 말고
창공되어 티끌 쓸어내고, 불안을 태워 버리리라
석양이 질 무렵 하늘 언저리를 빠알갛게 물들이는 노을은 환한 낮 시간을 서서히 삼켜 버린다. 끝내 노을 자신까지도 타들어가서 자취를 감춘다.
시를 쓰고 다듬지 않은 탓에 때론 격정적이다. 시인이 매번 시를 쓰면서 간절히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사무치는 그리움도, 구구절절 외로움도 사랑으로 가득한 시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시를 읽으면서 시의 의미를 낱낱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시를 되뇌이다보면 싯구가 독자들의 내면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해도 가끔씩 꺼내어서 찬찬히 음미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의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사진이 군더더기 없이 선명하다. 취미로 사진을 찍기엔 그 재능이 아쉽다. 다행히 이 책은 시인과 사진가의 콜라보로 한 권의 작품이 탄생했다.
올 봄이 지나기 전에 구례 화엄사에 다녀와야겠다. 책 '화엄사에 가고 싶다'를 들고 화엄사 경내에서 시를 나즈막히 낭송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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