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혹의 나이 중년에 이르를 즈음 사람들은 사십 여 년간 인생을 살아오면서 본인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인생의 구비구비마다 숱한 산전수전을 겪는다. 그래서일까? 책 내용을 몰라도 먼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이란 책의 제목에서 강렬하게 끌린다.

 

살다보면 문득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제목이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은 동명의 시가 포함되어 있는 남아메리카 페루 출신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가 쓴 122편의 시를 선별해서 실은 시선집이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되어 있는 시집은 내용면에서도 소장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세사르 바예흐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희망이 가득하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삶 자체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 쓴 시여서 인생의 쓴 맛이 녹아들어 있다.

 

세사르 바예호는 페루의 광산촌에서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혼혈로 태어났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를 기고하기 시작했고, 첫 시집 '검은 전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페루의 정치적 긴장 상태로 인해 구속 수감된 이후 머나먼 이국 땅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에 이어 스페인으로 유랑생활이 이어졌고 마침내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시선집에는 '검은 전령', '트릴세', '인간의 노래',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잔을 거두어다오' 총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그 이외의 시들도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단숨에 쓰윽 읽어내려갈 수 없다. 아래에 인용한 첫 번째 시 '죽은 종'부터 그렇다.

 

죽은 종

 

종루의 잿빛 관 속에
죽어서 묻힌 슬픈 종,
비극의 고독한 꿈속에
잊혀버린 시인의 영혼.

 

순교자의 그림자 같은
잊혀진, 조용한, 어두운 종,
황금빛 석양으로 물들어
종루 위에서 눈물을 쏟는다.
 

 

식지 않은 여름날 황혼녘
무너진 내 차가운 가슴팍에
눈물이 매달린다.

 

슬픈 청동처럼 죽어버린,
굳어버린, 말을 잃은 내 마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

 

도대체 '죽은 종'은 무엇일까? 종루에 매달려 머나먼 곳까지 굵직한 울림을 전해야 하는 종이 죽어 있다. 그것은 시인의 영혼이자 마음이다. 시를 여러 번 곱씹어서 읽다보면 차츰 시인의 마음이 독자의 마음에 은근하게 스며든다. 이게 그의 시가 지닌 매력이다.

 

직설적이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 싯구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자문자답하면서 여러 번 읽다보면 어느 새 시인에게 감정이입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독자의 입장에서 술술 읽히는 쉬운 시가 아니다. 그의 시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인생 자체가 불안정하고 험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또 다른 시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을 살펴볼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울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중략) 

 

엎드려서 사는 거라 해도 산다는 것은 어쨌든 늘 기분 좋은 일일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고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우리네 삶은 늘 뜻한 바대로 좋기만 할 수 없다. 때론 가혹한 운명 앞에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다가도 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심신을 다독이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간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서 고단한 하루일지라도 세월에 빗대어 삶을 향한 의지와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험난하고 고달픈 인생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가까운 혈육 형의 죽음도, 페루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도,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스페인 내전도 시인의 눈에서 목격한 무시무시한 사건이 그의 내면에 들어갔다 바깥으로 표출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싯구로 탄생한다.

 

독자들은 그의 시를 통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고단했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시를 포장하는 제목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어도 시가 주는 강렬한 서사적 메시지는 책장을 덮은 뒤에도 여운으로 남아서 내 무미건조한 영혼을 맴돈다.

 

완연한 가을날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스산한 가을날이면 괜시리 상념에 젖어들어 유독 시가 마음을 파고 든다. 그럴 때면 누구든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을 펼쳐들고 정독할 것을 권한다. 그동안 읽었던 서정시완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드는 새로운 시의 세계에 눈을 뜰 것이다.


http://blog.naver.com/geowins1/221109081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