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자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던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은 조화로운 정치 역학을 유지하면서 중세를 보냈다. 그러나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구와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이 조화는 깨어지고 동아시아의 삼국도 분열을 겪게 된다. 서구 문명과의 접촉에 있어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너무 준비가 없었고 그 결과는 그 이후 전개된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의 번역어란 기본적으로 개화된 문명의 언어를 반개 또는 미개의 언어 체계 속으로 불러들이는 구조적 체계의 전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카세트(보석함) 효과', 즉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비감, 그것이 일본 번역어의 성립 사정이라는 것이다. 도입된 언어에 1:1로 대응하는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경우 대안으로서 모색되는 것이 신조어와 전래어의 대입이다. 신조어의 경우는 해당 번역어에 합당한 의미 내용을 가진다고 하기 보다는 모호한 의미 내용으로 뭔가 있을 것 같은 카세트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

전래어의 경우는 전래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 내용과 번역 대상어의 의미 내용이 길항하면서 새로운 제 3의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앞의 신조어와 마찬가지의 카세트 효과를 만들어 낸다. 번역어란 이처럼 그 의미 내용의 모호성을 특징으로 함으로써 역으로 어떤 새로운 기능을 의도한다. 예컨데 번역어는 창조하고자 하는 근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활용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그녀'라는 어휘들의 번역어 성립과정을 탐색함으로써 번역어 성립의 사정과 그 내적인 성격을 밝히고 있다. 서구 근대를 받아들이는 태도라든가, 그 받아들임의 과정의 혼란을 번역어의 성립과정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번역어란 것이 결국은 일본의 그것에 다름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알면서도 국어 정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본식 한자조어의 폐기만을 부르짖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비합리적 행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무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철저히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 삶의 풍요로움을 이끌어 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시대 언어의 흔적은 말소되어야 할 부끄러운 무엇이 아니라 성찰해야 할 과거의 기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성찰이 재미를 앞서는 이번 독서의 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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