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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고 쓰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안진걸 지음 / 북콤마 / 2018년 9월
평점 :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상식적이 되었다면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한 영수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꽤 많은 영수증을 모아놓은 가계부다.
안진걸이라는 사람을 실제로 처음 본 것은 어느 토론회 뒷풀이 자리였다. 보쌈과 파전에 막걸리를 곁들인 단촐한 상 앞에 여남은 명이 모였다. 이십 대 대학생부터 곧 오십 대가 될 중년까지 좀처럼 한 자리에 함께 앉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심지어 대부분 처음 보는 사이였다. 어색한 첫 잔이 돌고나면 자리는 한층 더 어려워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누가 말을 해야 하지? 아니 꼭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말 없이 술과 안주만 먹는 것도 이상한데!'
상에 앉은 모두가 비슷한 생각이었을 때 그가 아주 뻔한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시키고, 오늘 토론회에 대한 감상을 들었다. 길고 짧은 자기 소개와 감상이 한바퀴 도는 동안 몇 번의 건배가 있었고, 추가로 주문한 술과 안주까지 무사히 다 먹을 수 있었다. 뒷풀이는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식당 밖에서 서로 잘 들어가라며 지하철과 버스의 동행을 서로 찾고 있을 때였다. 안진걸이 한 쪽에서 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약간은 들떠 있는 듯 시끄럽게, 사회 아닌 사회를 보던 그였다.
그 날 토론회는 1996년 3월 29일, '김영삼 정권 대선자금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집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 '노수석'의 20주기 기일을 기념해 연, 대학 등록금 문제 관련 토론회였다. 안진걸은 그날 발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는 노수석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
안진걸이 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 타면서 생각을 시작했는데, 답은 몇 정거장만에 나왔다. 이유가 있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없어도 울 수 있던 것이다. 이유를 찾던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은 그를 특이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유 없던 그의 울음에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이다.
안진걸의 책을 샀다. 첫 장을 열어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하기까지 30분이 걸렸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에 탄복하거나,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는 책이 아니었다. 책은 그날그날 정리하는 영수증 철과 같았다.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내용은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어!'라는 것들이었고, 결론은 '그래 이렇게 조금은 상식적으로 변하게 되었지!'였다. 지출과 수입은 생생하게 기억났고, 회계 장부를 넘기듯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내 영수증 철이 내 지출과 수입을 기록하고 있다면, 안진걸의 책은 그의 지출과 세상의 수입을 기록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안진걸은 함께 한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지만, 동료들은 모두 '안진걸의 지출이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열 사람 안에 꼭 들어가지만, 잘 기억되지 않는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려는 토론회 자리에 와서, 시키지도 않은 귀찮기만 한 뒷풀이 사회까지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들 홀가분하게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보인 눈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물 덕분에 내 삶이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상식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단지 가계부와 회계장부를 들춰보기 전까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회계장부를 비치해두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사서 보관해야 하는 책이다. 사지 않는 것이 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