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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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흰 뿔을 달고 사람들이 걷는다.

사이렌이 울리는 섬.

나는 순례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누구의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양한 마리

공중에 발굽을 내디딘다.

찻잔이 식어간다.
두 손이 꽁꽁 얼고

나는 언젠가부터 울지 않는다.
늘 폭설이 내린다. - P78

우물의 시간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 옛집에는 스스로 울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 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 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고 있었다. - P79

열대야

한 바퀴 동네를 돌고 오면 가족은 줄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여름에는 우는 법을 잊은 고양이가 돌아오고나는 꿈결인 듯 마당에 주저앉아 만져지지 않는 발을 만져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가족이 생겼는데, 너무잘 아는 얼굴, 어린 외삼촌이 나무에 걸터앉아 무서워서울고 있다. 내려가고 싶은데 나무는 조금씩 꿈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집이란 이곳에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병원 침대에서 외삼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한여름 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가족이었던 누군가가 폐허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 오래된 집은 파손되고 부서져 있다. 부서진 틈에 대고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죽은 고양이가 말했다. 얼마나 다행이니. 누구나 자라면 우는 법을 잊는대. 나는 잡히지 않는 백발이 마당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꿈 밖에서는 아무도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무너진 담장을 뛰어넘었다. 여름 바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먼저 죽은 삼촌은 나무에서 계속 자랐다. 우는 나무가 현실로 걸어 나갔다. - P85

폭염

수염이 없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옛이야기를 노인이 되어서야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깎으면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첫번째로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스스로 울 수 있는 순간부터 그는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는데, 두번째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는 수염을 깎고 인공눈물을 넣고 두 손을 모아 흐릿한시야를 가늠해봅니다. 어지러운 햇빛이 쏟아지네요. 비밀이 있다면, 세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매일매일 골목길의 잎들을 쓸어내고 건물의 유리창을 닦으면서 바깥으로 던져진 시간을 확인합니다. 인간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왜 이곳의 꽃은 항상 쓰레기 더미 위에서 피어날까요. 목련 나무 아래 놓인쓰레기를 버리며 생각합니다. 슬픈 기도가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한낮은 너무 뜨겁다고.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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