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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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점점 서로가 마음을 닫고 편견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21세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무엇보다 필요한 사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조는 단순히 전쟁의 폐허로 정체성 위기를 겪었던 유럽시민들을 위한 사르트르의 처방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마음의 처방전이다. 또 다시 인종주의, 배타주의로 닫혀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실존주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무엇보다 의미있을 것이다. 단순히 코로나를 떠나서 실존주의는 너와 나를 규격짓고, 서로 앞서 판단하고, 서로의 가치관을 짓눌러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지금의 무한경쟁의 시대(이는 국가, 개인, 인종 모두를 포함한다.)에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몇 안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뿐 만이랴. 나를 상품화하고 브랜딩화하는 끝없는 자본주의의 폭력속에서 용기있게 나를 그 가격표화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지침서 또한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도생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만은, 실존주의가 나온 배경을 생각해보면, 양차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시민들이 상실했던 건 단순히 무너진 건물과 그들의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보게 된다., 그들이 전쟁 후 발버둥치며 찾아댄 건 다름 아닌 자신들의 불안의 극복과 마음의 안정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것은 단순히 물질에 국한되는 자산 뿐만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실존하도록 하는 기준으로써의 '입법'을 재시작하라는 사르트르의 주문은 우리 개개인에 덧씌워진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한편, 동시에 그 입법에 대한 주체적 '책임'에까지 앙가제하게 만든다. 이는 고로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만 하다. 또한 읽다 보면 '시대정신'의 의미에 대해 회의가 꽃피우게 될 것이다. 시대정신이라는 것 또한 그 시대를 이끌려는 엘리트들의 '이념 전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기에....

마음에 들었던 구절:

18p "진리를 원하는 것, 그건은 모든 것보다 존재를 더 선호하는 것이다. 비록 존재가 재앙의 형식 아래일지라도 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말해서 존재가 있기 떄문이다." 이후에 사르트르는 그 자신이 제안하는 인간개념을 통해서 실존주의는 맑스주의와 대면해서 결코 여분의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33p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될 수 없다면, 우선은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로지 그다음에야 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이 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54p 내가 고려 중인 가능성을 나의 행동이 엄격하게 앙가제하지 못할 때, 이때부터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섭리도 세계와 그 세계의 가능한 것들을 결코 나의 의지에 맞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가 "세계를 이기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겨라"라고 말했을 때 결국 그 근본을 따져보면, 그는 같은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희망 없이 행동하라는 것 말입니다.

55p 당신이 타인의 후원을 기대한다는 말은 중국과 소련 등 다른 곳에서 타인들이 당신을 돕기 위하여 행하게 될 일에 기대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지만 인간적인 호의에 기초해서, 또는 사회의 이익을 위한 인간의 관심에 기초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로우며, 또 내가 기초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 본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74p 예술과  도덕 사이에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가 창조와 발명을 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것을 선천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79p 내가 인간이란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 또 인간이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자기의 자유를 원할 수밖에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 나는 이 인식과 동시에 오로지 타인들의 자유 욍는 다른 것을 원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인식한 것입니다.

80p (어떠한 한 도덕에 대한)  내용은 언제나 구체적이며, 따라서 내용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발명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발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발명이 과연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83p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배제해버린 이상, 이제 가치의 발명을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이 말은 삶은 그 어떤 선천적인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기 이전에는 삶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여러분의 몫이며, 이때 가치는 여러분이 선택하는 바로 그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여러분은 그 어떤 인간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5p (맑스주의가 선천적 확실성이라는 전제를 두고 질문을 한 피에르 나빌에 대해) 당신은 절대적으로 참인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확실성의 이름 아래 비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인간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확실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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