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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슬프다.
작가는 스스로 이 글에 대해 ‘갈망’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라고 부르고 있다.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하고 기록했다’라고 썼다. 맞는 말이라고 동의를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밖에 나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한은교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라고. 비록 그 사랑이 너무 심해 엉키고 엉켜 비극적 결말을 맞지만, 그 세 사람 사이에 존재한 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남자와 남자끼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토닉한 사랑이 에로스적인 사랑과 대비되어 쓰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성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는 같은 남자라도,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두 존재가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결국 사랑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상하관계가 아니어도 그러한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 스스로도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니기에.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이적요와 서지우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질은 바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들로 인하여 바뀌어 갔다는 점이다. 거기에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은교’. 결국, 소설은 플라톤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스승과 제자의 갈등이 뼈대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소설 자체에서는 스승보다는 제자가 스승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마도 이적요 스스로도 여러 번 작품에서 언급했듯이, 세속이라는 욕망을 철저한 전략하에 감추고 살아온 그의 인생관과 관련이 되어 있는 듯싶다. 그는 스스로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오로지 詩라는 장르만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산다. 책상 서랍 속에 소설과 희곡을 써서 보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전략이라 부르고 있다.
제자 서지우는 스승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작가로서의 자질 없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스승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은교라는 존재를 스승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기는 모험을 했던 것이고, 우연치 않게 스승에게 발각되고 마는 상황 속에서 스승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은교는 책 여러 곳에서 현재의 신세대로 그려지고 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거나, 약어를 쓰는 모습, 서지우와의 대화에서 ‘원조교제’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쓰는 모습, 그리고 실제로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서지우와 섹스를 하던 모습(은교가 용돈의 대가를 바라고 했다라고는 책에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모습, 어려운 가정 환경 하에서도 비뚤어지지는 않는 모습, 이적요와 서지우의 일기에서 자신과 관련된 부분은 빼고 공개해달라고 Q변호사에게 당차게 부탁하는 모습 등. 책을 읽는 내내 실제 은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로지 이적요와 서지우의 시각에서만 현상을, 관계를 바라고고 있었고, 가끔 Q변호사의 입장에서도 그려졌기 때문에.
은교는 왜 이적요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녀는 분명히 서지우를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서지우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곳은 찾아볼 수 없으나, 이적요를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이나, ‘멋지다’고 표현하는 모습, 엄마한테 맞고 이적요의 집 2층에서 자다가 무섭다고 1층에 있는 이적요의 침대에 같이 들어가 웅크리고 자던 모습, 이적요의 가슴에 문신을 새겨주기 위해 거리낌없이 하는 행동 등은 그녀가 이적요를 사랑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일까? 지긋이 나이 들어 70을 바라보는 노인을 그녀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혜민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사랑이란 내 마음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순간에 불쑥’ 찾아온다고 했듯이, 그녀에게도 사랑이 불쑥 찾아왔던 것일까?
소설의 뼈대인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70, 40, 17이라는 나이 차이에서 비롯된 사물과 현상을 인지하는 인식이 차이에 있다고 생각된다. 처음 은교를 보고 그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처녀’라는 인식을 갖게 된 이적요. 그에게 은교는 처음부터 그리고 서지우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 날까지 말 그대로의 ‘처녀’였다.
서지우는 은교가 이적요에게 가는 중에 몇 번 차를 태워줘서 알게된 고등학생이고, 섹스까지 가서는 사회의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정도의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다. 서지우가 은교를 그렇게 아름답고 그러기에 아껴야 한다고 느끼는 대목은 없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은교를 이적요의 집 청소를 위한 알바생으로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은교에게는 서지우와의 섹스가, 자신을 그냥 챙겨주고 용돈도 주는 사람에게 몸을 잠시 내어주는 정도의 행위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내재되지 않은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이다. 이미, 서지우가 첫 경험도 아니라고 했었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있는 세 주인공들간의 현상에 대한, 아니, 이적요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할 것이므로 지고지순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소설의 결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오고, 주위에서 보고 느끼고 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의 가치관을 만든다. 그러한 가치관끼리 차이가 많을 때, 갈등이 생긴다. 이러한 갈등이 대화를 통해 풀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안 풀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면 될 터이지만,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에는 그 과정이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나누었어야 할 대화가. 서로를 위해 참는다 하지만, 참다참다 터지는 말들은 서로를 공격하는 말이 되었고,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가졌던 상처들이 나이와 실력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의 열등감으로 자라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은교라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 혹은 애착의 기폭제를 통해 터지고 말게 된다. 비극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