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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 ㅣ 반올림 49
정승희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0년 10월
평점 :
불과 몇년 전이었던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대세인듯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밀려나간 적이 있다. 기성세대들이 청춘들의 아픔과 고난을 미화하며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다 못해 아픔과 고난의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청춘은 역경을 극복해 내지 못한 유약한 젊은이들로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꼰대라고 불리는 어른들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고난 극복기를 흡사 198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자연스레 낭독하듯 체화하고 살아온 데서 나온 슬픈 일이었다.
<아린>을 읽으면서 저녁에도 불꺼진 집과 차가운 학교를 오가며 혼자 힘으로 꿋꿋하게 버텨내려고 애쓰는 지혁이와 또래의 청소년들을 여럿 만났다. 내가 알고 있는 이웃들 중의 한 명 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가까운 가족의 한 명일수도 있다. 또 어떤 선생님의 제자들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내 아이의 친구의 친구 아니면 그 친구의 친구들 이야기일수도 있다.
나는 지혁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고 꿈꾸어 온 좋은 어른들이 여럿 나와 주어 무척 고마웠다. 트라우마를 지닌 채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잡상인 아저씨의 어설프고 구수한 보살핌도, 식당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도, 편의점 아주머니 사장님의 배려도, 그리고 아들 지혁이의 곁을 혼자 힘으로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어머니의 꿋꿋하고 투박한 사랑도 고마웠다.
지혁이와 친구들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선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어른은 겨울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며 외롭고 시린 마음을 감싸안아주는 보호막 같은 어른이라고 말한다. 기꺼이 <아린>이 되어줄 어른, 자신의 <아린>이야기를 들려줄 어른들을 기다린다고 지혁이 말하는 것 같다. 잔소리꾼,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자신만의 기준과 잣대에 갇혀 딱딱한 심장을 가진 꼰대 어른이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마음이 먹먹해지고 아려왔지만 책을 덮을 즈음엔 지혁이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졌다. 지혁이 원하고 바란 그 모습대로 또 한명의 <아린>이 되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이놈과 이별해야 할 때가 온것 같아. 너도 이제 쉴 때가 된거야. 그동안 나를 지켜 주느라 수고했어. 경찰서에 갈 거야. 내가 벌여놓은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쓰레기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텅,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깊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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