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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문명 - 서구중심주의에 가려진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재발견
임기대 지음 / 한길사 / 2021년 12월
평점 :
이번 한길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받게 된 첫 번째 책은 바로 <베르베르 문명>이다. 부제목은 ‘서구중심주의에 가려진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재발견’으로, 지중해 해안부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헬 지대 등등에 거주하고 있는 베르베르인과 그 문명을 다루고 있다. 지도를 펼쳐 아프리카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아프리카의 국경이다. 마치 지도에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반듯한 일직선인데, 유럽인들이 민족 국가라는 개념으로 인위적으로 국경선을 그려 넣으면서 식민 지배를 한 탓이다. 특히 지중해, 그리고 여러 나라들과 맞닿아 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은 지정학적 특성과 유럽인들이 그려놓은 국경선 때문에 그들 문명은 가려지고 지워져 왔다. 우리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며, ‘이슬람을 믿는 아프리카’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서구중심주의적인 관점에 경계를 표한다. 지리적, 종교적 단위의 인식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에 공존하는 다양한 문화를 살펴보자고 주장하며 책의 본론을 이어 나간다. 아프리카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 책은 내게 이슬람과 아프리카를 언어, 역사, 문화 등의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다. 중심이 아닌 주변과 소수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관점을 많은 이들이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책을 집필하신 임기대 작가님은 언어학자이시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교수, 아프리카연구센터장, 그리고 법무부 난민위원회 자문위원회로 계신다. 저서로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사상을 깊이있게 다룬 <시대의 지성 노암 촘스키>가 있고, 베르베르 문명과 정체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셨다.
목차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 베르베르(Berber),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2. 베르베르어 사용과 네오-티피나그(Neo-Tifinagh)
3. 역사 속의 베르베르 문명
4. 베르베르 문명 속의 특이 요소들
5. 베르베르 디아스포라(DIaspora)
6. 베르베르 예술과 음식
책 제목이 <베르베르 문명>이니, 베르베르와 마그레브(북아프리카)에 대한 설명 먼저 해 보겠다. 마그레브는 아랍어로 ‘해가 지는 지역’을 뜻하며 아프리카의 사하라, 지중해에 고립되어 있다는 지리적 의미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마그레브 지역의 ‘베르베르’는 어떤 의미일까. 작가님은 베르베르의 의미를 규정하는 대신 이들이 만들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주로 마그레브 북쪽 지역에 존재하는 이들을 베르베르인이라 부르긴 하지만, 이 용어는 ‘외국인’이라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스인도, 아랍인도 아닌 외국인을 부르는 용어였다. 베르베르라는 언어 속에도 타자화된 관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타자화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고귀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을 뜻하는 ‘이마지겐(Imazighen)’으로 부른다. 여기서 베르베르인의 독자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언어와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베르베르인은 고유 문자 체계인 네오 티피나그(Neo-Tifinagh)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알제리는 독립 이후 국가 내 남아있는 프랑스 문화를 없애기 위해 아랍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수 문화인 베르베르어가 배제되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베르베르어와 문화를 되찾기 위해서 1980년에 베르베르 운동을 실시하였고 이에 모로코는 2011년부터, 알제리는 2016년부터 베르베르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작가님은 베르베르어 문자는 계속 확산해 가고 있으며, 마그레브 지역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베르베르 정체성 운동은 민중 시위 히락(Hirak)과도 관련이 있다. 아랍의 봄 이후 발생한 히락은 나아지지 않는 경제 발전, 실업, 인권 문제, 베르베르 탄압, 이슬람화 정책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이 일으킨 시위다. 소수 문화에 대한 차별에 맞서고, 타자화되기를 거부하는 베르베르인의 행적을 읽어 내려가며 나도 그들 목소리에 고양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베르의 정체성 운동과 ‘히락’ 부분을 보고서 테드 창의 sf 소설집 <숨>에 실려있는 단편 소설 <거대한 침묵>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는 환경 파괴로 멸종될 처한 앵무새가 등장한다. 앵무새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던 인간 때문에 그들의 언어, 의식, 전통, 목소리는 영영 사라져 간다는 내용이다. 지금 시각 지구 어딘가에도 어떤 민족, 혹은 종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수자의 목소리 자체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목소리를 듣는 이들의 존재 역시 중요하다. 나는 <베르베르 문명>을 읽는 행위 역시 사라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듣는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도 어떤 맥락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자꾸 외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어야 한다는 것. <베르베르 문명>으로부터 얻은 사유다.
<슬프게도 우리 신화는 우리 종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 그런 연유로, 우리의 멸종은 단지 한 무리의 새들의 멸종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의 언어와 의식과 전통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의 목소리가 소거되는 것이다. > 342p
추가로 책의 만듦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의미를 풀어가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웠다. 책에 수록된 사진이 흑백인 것은 살짝 아쉽다. 중간중간 맛있는 음식 사진, 풍경 사진 등이 나오는데, 색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심층적인 ‘생각해볼 문제’ 페이지가 있다. 앞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해 놓은 질문들로 독서 모임에서 토론을 진행해 보거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독서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임기대 작가님의 베르베르 문명은 아프리카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은 물론, 나처럼 문외한인 분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을 통해 서구중심주의에 가려진 베르베르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이들에게 주목하는 일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베르베르인 스스로는 타자화된 이름으로가 아닌 ‘이마지겐(Imazighen)’으로 스스로를 지칭한다. 이 말의 어원은 보통 ‘자유로운 사람’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며, 베르베르인은 스스로를 이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46p
<역사 속의 ‘베르베르 문명’은 인간과 자유, 평등에 기반을 둔 행동을 지향한다. 타자를 향한 모든 억압에 그들의 주저 없이 함께 맞서 싸울 것임을 지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176p
<베르베르인은 그 어떤 민족, 국가, 문명보다 앞서 존재했고,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문명을 일구어왔다. 베르베르인은 페니키아, 로마, 아랍 이전부터 존재한 마그레브 지역의 토착민이다, 단지 지배자들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가려졌을 뿐이었다.> 34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