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틈입자 파괴자
이치은 지음 / 알렙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는 판타지 소설/영화보다 리얼리티 있는 소설/영화를 좋아한다. 애써 감동을 주려는 식상한 소재들이 범벅된 해피엔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티가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현실은 분명 비현실적인 데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판타지 내지는 신비가 자리한다.

 

이 소설에는 분명한 장치들이 있다. 이 장치들은 상식적인 것들이 아니라서, 누군가 자세히 설명해야 하고 누군가 자세히 이해해야 한다. 독자는 편안하게 이 책을 수용하기보다 책의 내용과 팽팽히 맞서 능동적으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생명과 생명력 그리고 생명의 활동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제거하는 듯한 이 냉담한 소설이, 한 생명의 능동적인 생명 활동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초록색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람도 없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가짜 사막” 같은 이 소설 속에서 나 역시 ‘두려움’을 느꼈다. 점점 숨이 멎는 기분. 살아 있는 것들이 갈망하는 진심과 애정 같은 욕망은 모조리 아스팔트 아래 생매장 되어 있는 이 시대의 축소판이 주인공의 꿈 아닐까.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같이 무표정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이 소설은 살아 있는 것들의 끈을 하나씩 끊어간다. 자기 아기의 죽음, 자기 아내의 죽음, 자신의 (정신적) 죽음, 그리고 가장 친밀한 친구의 (정신적) 죽음, 그리고 같은 증상의 사람들의 죽음, 꿈 속 인물들의 죽음, 육체적 소통의 죽음, 언어적 소통의 죽음, 모든 온기 있는 것들의 죽음, 모든 의미의 죽음, 그리고 마침내 최종적인 언어 자체의 죽음.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아기를 불태웠고, 우리는 괴로웠어.”

 

“이주는 그녀 속에 들어 있던 모든 감정들을 싹 비워 버렸고.”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던 성적인 감정을 빌미로 한 육체적 접촉이 전무한 상태..”

 

“그 선생 죽었대. 자살했대.”

 

“내가 존재하고 있는 지금 여기엔, 말도 글도 그리고 소통도 더는 없다. 사라져 버렸다. 거의 완전하게.…여기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읽지 못한다. 읽지 못하고, 읽지 않을뿐더러, 읽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종이 위에 찍힌 스무 개나 서른 개 남짓의 음소들로 이해될 수 있는 의미라는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존재와 소통이라는, 너무나 마땅한 삶의 요소를 고민하고 회의하는 시대. 이 냉담함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아니, 싸울 필요가 있는 것일까. 주인공 같은 태도가 더 타당하고 마땅한 귀결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울림은, 엄마와 단절된 소통을 이야기하다가 불 꺼진 기숙사 침대 안에서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 소리에, 그리고 주인공의 선배가 그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임신한 상태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마시는 그 술 한 잔에, 그리고 갓난아이를 잃은 젊은 엄마의 절규에, 있다.

 

 덴마크와 그린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라는 소설에서, 세상에서 가장 냉담할 것 같은 여자 주인공 스밀라는 의외로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정말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삶의 본질은 온기라고..

 

관계와 관계, 생명과 생명, 소통과 소통 사이에는 은유적 아기가 태어난다. 결혼한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생명이 된 것처럼.. 그 생명이 지난 관계와 생명과 소통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아기를 손쉽게 제거할 수는 없다. 아기를 원하지 않는 이는 애당초 관계와 소통마저 포기해야 하므로, 파선한 배 위에서 주인공은 그렇게 모든 것을 바다 위로 던져버린다. 폴리우레탄 바닥의 가짜 사막은  주인공 자신이 만들어 낸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끔찍해하고 두려워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소설의 화자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주인공의 꿈이 현실화 된 폴리우레탄 바닥의 가짜 사막이다. 훅 불면 얕은 모래는 날아가버리고 언제든 가짜임이 드러나고 마는, 냄새도 바람도 없는 그 곳. 그 진공의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문자를 아는 이 화자가 쓰는 소설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네는 것일까. 생명과 소통이 아예 없어진, 소름끼치는 그 정적에서 보내온 편지 같은 소설. 결국 삶의 본질은 온기라고 믿어야 하는 걸까.

 

"기세의 한 수지요. 여기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p. 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일조의 비밀을 안 세계의 부자들
박은몽 지음 / 문예춘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큰 재물을 얻으려면 십일조를 내야 한단다.. 예수님이 통곡하실 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