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거야? 얼씨구, 네 녀석이 언제부터 그렇게 기독교 신자가 됐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반드시 구도자의 몫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를 조롱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서로의 불신 속에서 야훼도 뭐도 염두에 두지 않고 태연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 P25
인간에게 공포심이 심한 사람들은 오히려 무서운 요괴의 모습을 확실히 두 눈으로 보고자 하는 심리가 있고, 남들의 신경질에 다치기 쉬운 사람일수록 차라리 폭풍우가 강력하게 몰아치기를 기도하는 심리가 있는 법이다. 아아, 이런 부류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괴물에게 상처 입고 인간들의 협박에 몰린 끝에 결국 환영을 믿게 되어 대낮에 자연 속에서 요괴의 모습을 생생히 본다. - P40
나는 어찌 된 사람인지 여자의 신세타령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서, 그건 여자의 말솜씨가서투른 탓인지 아니면 얘기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탓인지, 아무튼 나에겐 늘 쇠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외로워. 나란 사람은 여자가 늘어놓은 천 마디의 신세타령보다그 담담히 내뱉는 한마디에 공감할 거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 여자들에게 결국엔 한 번도 그 한마디를 듣지못했다는 점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 P65
어찌 보면 난 다른 이에게 호감을 사는 법은 알고 있었어도, 다른 이를 사랑하는 능력은 결여된 것 같았습니다(더군다나 내겐 이 세상의 다른 인간들도 과연 ‘사랑‘할 능력이 있는지 무척이나 의문입니다). 이런 내게 남들 다있는 ‘친구‘ 따위가 생길 리는 없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 내겐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 문 앞에 서면 마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보다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들고, 그 문 안에는 무서운 용처럼 비린내나는 괴물이 우글거리고 있을 것 같은 공포를, 과장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누구와도 교제가 없다. 그 어디도 방문할 수 없다. - P90
그날 이후부터 내게는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게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관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지금까지보다 약간은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면 나는 약간 제멋대로 행동하게 됐고 쭈뼛거리며 눈치만 살피지도 않게 됐습니다. 또한 호리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척이나 구두쇠가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게코 말로는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않게 됐습니다. - P103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싸움에서, 바로 그 자리의 싸움에서, 거기서 이기면 되고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노예조차 노예 나름의 비굴한 앙갚음을 하는법이니 인간에겐 ‘단판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해나갈 길이 없고,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이루고자 노력한 목표는 반드시 개인으로 귀결되고, 개인을 딛고 일어선 다음에도 다시 개인을 향하므로 세상의 불가사의는 개인의 불가사의고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을 말한다는 관념을 갖고 나니, 난 세상이라는 큰 바다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 약간은 해방되어, 이전만큼 이것저것 오만 가지 일에 걱정하는 일 없이,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됐습니다. - P107
말하자면 ‘과학적 미신‘에 늘 가슴 졸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확실히 수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공기 중에 떠돌고 날음식 안에 잠복해 있는 건 ‘과학적인 사실이겠죠. 하나 그와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하면, 그것은 나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과학적 유령‘에 불과하다는 점도 나는 알게 된 겁니다. 도시락통 안에 먹다 남긴 밥알 세 톨, 천만 명이 하루에세 톨씩만 남겨도 그건 쌀 몇 섬을 낭비하는 꼴이라든지, 혹은 천만 명이 하루에 코 푸는 휴지 한 장씩만 절약하면 얼마만큼의 펄프를 아낄 수 있는가 하고 떠드는 ‘과학적 통계‘를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여, 밥알 한톨을 남길 때마다, 또 코를 풀 때마다 산더미 같은 쌀과 산더미 같은 펄프를 낭비하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나 자신이 지금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암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허점‘, ‘통계의 허점‘, ‘수학의 허점‘으로, 밥알 세 톨은 모두 모을수 없을뿐더러, 곱셈 나눗셈의 응용문제로 봐도 참으로 원시적이고 질 낮은 테마여서, 마치 전등불이 없는 컴컴한 변소 구멍에 사람들이 몇 번마다 발을 빠뜨리는지, 또는 전차의 출입문과 플랫폼 사이에 승객 몇 명 중에 몇이 발을 빠뜨리는지, 그런 확률을 계산하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어리석은 일로,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변소의 구멍을 잘못 타고 넘어 다쳤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고, 그런 가설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세뇌당해 완전한 귀결로 받아들이고 무서워한, 어제까지의 나를 가련하게 여기며 웃고 싶을 정도로, 나는 세상이란 것의 실체를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 P109
죄의 반대말이 법률이라니!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치부해버리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형사가 없는 곳이야말로 죄가 꿈틀대고 있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뭐야, 신인가? 너한텐 어딘지 모르게 사이비 교주 냄새가 풍긴단 말이야. 찜찜하게." "그렇게 단순히 잘라 말하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건 그래도 꽤 재밌는 테마 아니야? 이 테마에 대해 뭐라고 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설마 무슨. ......죄의 앤터는 선. 선량한 시민, 다시 말해서 나 같은 사람이다." "농담 그만하고. 하지만 선은 악의 앤터지. 죄의 앤터가아니잖아." "악과 죄가 다른 건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야. 인간이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낸 도덕적인 말이지." "집어치워. 그렇다면 뭐, 신이겠지. 신, 그래 신이 맞아, 신이라고 하면 틀림없을 거라구. 아, 배고프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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