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도정일 님의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를 읽고 생각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했다.

좀 가벼운 책으로 기분전환을 하려고 잡은 '장서의 괴로움'은 한마디로

'나 책 많아. 부럽지?' (-.-;;)

 

천 권도 안되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나로서는 3만권, 4만권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일단, 집이 얼마나 넓어야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서?

저자는 주로 헌책을 사기에 새 책을 정가로 사는 것보다야 싸게 샀겠지만 그래도 3만권을 권 당 5천원으로 계산하면 1억 5천만원이 된다!!! 

 

가족의 핀잔과 눈치 속에 책을 들여오는 나로서는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고, 일본의 헌책방 문화와 여러 작가들, 그리고 읽어보고 싶은 많은 책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당장, 이 독후감을 쓰기 전에 책에 소개된 일본 진보초, 역자 후기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도 검색해보았다. 이 책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헌책방에 관한 책이 뭐가 있나 검색해볼 것이고, 이렇게 또 소장도서가 늘겠지. 책을 읽고 '장서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도를 구하려다 '걸려들었다!'

 

<의미있게 읽은 부분>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꼭 필요한 책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원활한 신진대사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혜롭게 만든다. 건전하고 현명한 장서술이 필요한 이유다.

 

 

이 마음, 누구보다 잘 안다. 여행이나 일 때문에 지방에 가서 호텔에 짐을 풀고 그날 밤 침대에서 읽을 책을 좁은 테이블 위에 몇 권 놓아두면, 책장이니 뭐니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그 책 몇 권이 아주 고맙게 느껴진다. -> 나도 유럽 여행 갈 적에 안그래도 꽉 차는 캐리어(그것도 무게가 제한되어 있는)에 책을 여러 권 쑤셔넣어 욕먹은 적이 있던 터라 아주 공감간 부분.

 

 

어떤 의미에서 서재는 책장을 갖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책장이 있으면 책을 꽂아두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 책장을 채우고 싶은 욕구는 본능이었던 것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야.

 

 

책이 느는데도 책장을 사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책장 살 돈이 있으면 책을 샀기 때문이다.

 

 

그는 책장을 살 수 없어 책을 귤 상자에 담아 쌓아두었다. 그걸 본 친구가 불이 났을 때 들고 옮기기 좋겠는데, 라고 말했다.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후쿠하라는 달랐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구나.’ 친근함을 느꼈다. -> 절대 불에 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목록을 뽑아서 따로 한 칸에 모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들고 나갈 수 있게.

 

 

흔히들 벽에 책장을 붙여 세운다. 책장은 ‘벽 먹는’ 가구인 셈이다.

 

 

시노다 하지메가 말하는 ‘5백 권의 가치’는 이랬다.

책 5백 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시노다는 덧붙여 “필요할 때마다 자유자재로 열어볼 수 있는 책이 책장에 5백, 6백 권 있으면 충분하고, 그 내역이 조금씩 바뀌어야 이른바 진정한 독서가”라고 썼다.

 

철제 책장 세 개에 지금은 손에 넣기 힘든 고서, 항상 베스트 100 안에 드는 애독서, 자료로 자주 펼쳐보는 책을 엄선해 꽂아두고 그 이상 책을 늘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이상적인 장서다.

 

진정한 독서가는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던 나가야마 소년은 중학 시절 여름방학 때, 삼일밤낮을 독서에 빠져 있다가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때는 ‘이대로 실명해 평생 책을 못 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렸다. 다행히 얼마 후 눈이 떠져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때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몸을 아껴가며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책은 내용물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책갑에서 책을 꺼내, 읽기 전에 먼저 만지고, 책장을 펼치는 동작에 ‘독서’의 자세가 있다. 그에 수반하는 소유의 고통이 싫지 않기에 ‘장서의 괴로움’은 ‘장서의 즐거움’이다. 제 생각이 고리타분한가요? 정말 그런가요? 전 이것이 결정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전자서적’은 전자 콘텐츠이지, ‘책’은 아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지음 / 난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에 요리를 배우기 위해 자주 들락날락한다는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다년 간 겪은 각종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음식을 소개한다.

읽다 보면 이탈리아에 가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정말 헷갈리는데, 정말 그의 말처럼 책장을 덮을 때면 꼭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단점과 약점을 모두 캐내어 하나하나 씹으며 욕을 하다가도, 문들 우리의 사정과 비교하며 도진개진이라 해버리니, 이탈리아가 꼭 그렇게 방문금지국가는 아닌 듯하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각종 소매치기 수법들이 나열되는데, 흔한 소매치기 외에 여행자가 주의해야 할 매듭 야바위는 도움이 될 듯하다. 그다음 이탈리아에서 주의할 점으로 렌트카 털리기, 집시 떼의 공격 등이 줄줄 엮여나온다.

하지만 작가는 반전을 시도하는데, 이탈리아 외곽의 경치앞에서는 GG를 외치게 된다고.

 

게다가 작열하는 5월의 태양과 사이프러스 나무, 코발트블루의 하늘과 바다는 또 어쩔 것이냐(어때? 떠나고들 싶으시지? 집시와 좀도둑 밭을 떠나면 달콤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니까.)

 

 

뭐 이런 식이다. 이러니 안 가볼 도리가 없다.

 

 

작가가 셰프이니 당연히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 많이 나오는데, 요약하자면 ‘소스를 최소로 줄이고 신선한 재료만으로 최고의 맛을 낸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맛이 끝내주는 음식’이 이탈리아 음식이라는 거다. 지방마다 재료나 요리법이 매우 달라서 무엇이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지리적으로 국토의 가운데 있어서 중용의 맛을 보여주는’ 토스카나 요리라고 한다.

 

토스카나의 대표 요리를 꼽지면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다. 1킬로그램이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 피가 뚝뚝 흐르는 원시적 육식, 게다가 아무런 소스 없이 레몬 즙과 소금만 뿌려 나오는 이 거대한 스테이크는 정말 “기왕 남의 살을 써는 스테이크라면 이 정도는 호쾌해야지”하는 공격 본능을 충족시킨다.

 

 

작가의 작법 스타일이 무척이나 웃긴데, 맥주 한 잔 하면서 친구에게 ‘내가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무슨 일을 겪은 줄 알아?’ 하면서 얘기하는 듯한 내용인데 비속어도 섞여 있고 정말 기막힌 비유도 있고 해서 정말 실실 웃으면서 읽었다. (‘졸라’ 같은 단어를 마주치곤 아, 이렇게 써도 금지도서는 안되는갑다 했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랄까? 이런 실실거림은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으면서도 겪었던 증상인데, 빌 브라이슨과 요나스 요나손 모두 기자 출신이라 ‘기자들은 기사가 아니면 이렇게 글을 쓰라고 배우나’ 싶었는데 박 작가는 요리사인데도 실실거림을 유발한다. 문체와 직업은 관계가 없구나!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책 제목이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도 아니고 뭐 이런가)과 ‘~100세 노인’은 독서 후기를 쓰지 못했는데, 이런 책은 읽을 때는 좋은데 독서 후기를 쓰려고 할 때는 난감해진다. 줄거리를 줄줄 나열하기도 그렇고, 재미있었던 부분을 다 발췌하자니 책을 한 권 옮겨 적는 것에 다름 아니고. 그래서 이 책도 독서 후기를 포기해야 하나 했는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읽은 흔적을 남기니 미소가 지어진다.

 

 

이 책을 목차만 읽고도 책 내용이 궁금해 바로 책을 읽어버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탈리아에 없는 게 이태리타월만은 아니다’ 라는 목차 앞에서, 해당 페이지를 열고 안 읽을 수 있는가. 결국 이태리 식당에는 무엇 무엇이 없는지 알아냈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할 수는 없다. 내가 이 책의 판매량을 갑자기 내릴 수는 없으므로. 이것 말고도 목차만으로 나의 호기심을 자아낸 부분이 여럿 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피자 사냥에 강력한 무기다(그 무기를 나에게 알라달라고)

바로 우리! 우리는 엿 먹이는 데 챔피언이지(우리가 누구?)

네가 뭘 먹는지 말하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마(주방 개 3년이면 관상을 보나?)

말하자면 이탈리안 카오스다(뭣 때문에 혼돈?)

피에몬테, 며느리에게도 안 가르쳐주는 비밀 장소(이 대목에서 나는 책상 위의 지구본을 무심코 돌렸다가 이탈리아는 로마, 밀라노, 시칠리아 섬 밖에는 안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내 자신을 책망하며 구글 맵을 켰다)

네 손님! 주문하신 ‘포르노’ 나왔습니닷(여기부터 읽어야겠어)

 

 

내가 이 책을 2013년 8월에 구입하고도 지금에야 읽은 것은 순전히 출판사 때문이다. 나의 엄청난 기대에 부응하여 집으로 배달되어왔을 때, 나는 책을 꺼내보고 실망하고 말았다. 디자인에 무심한 표지는 알고 샀지만, 가로 길이가 짧은 판형에 종이 질도 낮고, 그 유명한 최갑수의 사진은 책의 알맞은 부분에 쏙쏙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 한가운데 몇 십 장이 뭉뚱그려 붙어있는 것이었다. 기왕지사 만드는 거 좀 더 이쁘고 고급지면 안되냔 말이다! 그 결과 계속해서 사제끼는 책들에 밀려 책꽂이에 모셔져 있다가 날은 좋아지지만 집에만 있던 어제 오늘 드디어 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임프린트’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으니 출판사와 나와는 쌤쌤인 셈이다. 내 책에는 1판 2쇄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쯤은 몇 쇄까지 나왔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책 여기저기에는 맛집을 찾는 비법이 나와 있다. 적어뒀다가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면 꼭 써먹어볼 일이다.

누군가 그랬지, ‘언젠가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라고. 흑흑.

게다가 작열하는 5월의 태양과 사이프러스 나무, 코발트블루의 하늘과 바다는 또 어쩔 것이냐(어때? 떠나고들 싶으시지? 집시와 좀도둑 밭을 떠나면 달콤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혼한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 애인, 아내, 엄마딸 그리고 나의 이야기
김진희 지음 / 이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쓴이가 '삶이란 스스로 웃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겨우 깨닫고', '고개를 들어 대화를 청하기 시작한' 책이라 하여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치르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조곤조곤한 마음글과 따뜻한 그림을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결론은, 책의 맨 뒷장까지 다 읽었지만 축축 쳐지는 푸념과 하소연의 연속이었다.

 

책의 중간쯤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결혼전엔 잘 나갔다, 이해가 안되는 남편을 만나서 힘들다, 남편도 힘들고 시댁도 힘들다 이런 푸념은 중간까지만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생활 속에서 어떤어떤 기회가 오고 용기를 내어 이만큼 행복해졌고 남편과도 회복이 되었다, 행복할 준비가 되었다, 여러분께도 행복을 나눠드리고 싶다, 어떠냐, 이 책을 다 읽어가니 조금이라도 행복해졌냐 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어쩜 그리 처음부터 끝까지 하소연과, 그럼에도 이 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밖에 없다는, 어느 정도 '체념'하니 좀 나아졌다는 그런 말.

 

그리고 이해 안가는 또 한가지는,

전혀, 글의 문맥과 맞지 않는 생뚱맞은 그림들이었다.

그림 옆의 설명은 어떻게어떻게 해서 본문과 맞춰놨지만, 그래서 말이 안맞고 안통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결론은, 글과 그림 모두 실망.

나는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어느 여자에게도 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책 한권을 읽었으니 좋은 표현이다 싶은 것 몇 군데를 적는다.

 

.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낯선 곳을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새로운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결국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도록 용기를 준다.

 

.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가장 유명한 부분처럼,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다. 한때 운명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내가 원했던 사람이 아닐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때는 내가 그 사람을 원했고, 그래서 그 사람이 나의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면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서 내려 결혼이라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

윤이 나는 새 숟가락 두 개만이 신혼집 살림의 전부는 아니다. 각자 들고 온 두 권의 낡은 앨범과 그 속에 들어있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지닌 사연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부터 진정한 세간 장만의 시작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상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습관과 상처의 골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다.

 

.

부부란 어차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물줄기 같은 감정의 반복 속에서 인연의 겹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괜히 복잡해서 싫었던 표현>

 

삶이란 공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쌓이는 생활의 무한한 층임을 우리 부부의 인연 앞에서 문득 깨닫는다.

 

 

맨발에 신고 나온 구두의 딱딱한 가죽은 자라는 이가 간지러워 무엇이든 긁어야 하는 생쥐처럼 걸음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살갗을 벗기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인간적인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비 오는 날 기꺼이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남자가 다시 우산을 쓰고 비에 약간 젖은 머리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석류처럼 빨간 불씨가 수증기 가득한 대기속으로 하얀 연기구름을 피워 올린다.

 

 

…곰삭아 깊숙이 파인 속에서 꺼낸 눈물을 흘릴 때…

 

 

그러나 아무리 살가운 고부라 해도 피를 나눈 부모자식이 아닌지라 그동안 묵과한 진실의 세찬 매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좋은 부분이건 싫었던 표현이건 발췌하기 위해서 다시 책을 펼쳤는데, 다시 기분이 다운되어 여기까지만 하고 책을 덮는다.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낯선 곳을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새로운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결국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도록 용기를 준다.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가장 유명한 부분처럼,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다. 한때 운명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내가 원했던 사람이 아닐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때는 내가 그 사람을 원했고, 그래서 그 사람이 나의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면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서 내려 결혼이라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윤이 나는 새 숟가락 두 개만이 신혼집 살림의 전부는 아니다. 각자 들고 온 두 권의 낡은 앨범과 그 속에 들어있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지닌 사연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부터 진정한 세간 장만의 시작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상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습관과 상처의 골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다.

부부란 어차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물줄기 같은 감정의 반복 속에서 인연의 겹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