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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평점 :
<기린의 심장>이라는 제목은 표지부터 눈에 띄었다. 푸른 배경색에 대비되어 더욱 새빨갛게 보이는 나뭇잎이 담긴 표지 커버는 마치 심장을 연상시킨다. 높은 나무로 표현한 이유는 키가 큰 기린과 연관되어 보였다. 기린은 동물 이름을 댈 때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동물이지만, 애초에 '기린의 심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독 눈에 잘 들어오는 표지 색감, 익히 알고 있는 단어로 이루어진 생소한 제목은 책을 펼치고 싶게 만든다.
<기린의 심장>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있고 각기 다른 인간들의 불행을 담고 있다. 때로는 개인적인 사연으로, 혹은 사회의 부조리와 엮이며 저마다의 사연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낯설지가 않다. 모두 우리 주변에서 한 번은 봤을 법한 사람, 스쳐 지나가거나 전해 들었던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배경이 현대 한국이라서가 아니다. 지구를 점령한 외계인이 등장한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는, 가상의 세계관 속에서도 부정적인 인물의 모습과 꼬집어내는 사회의 단면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다. 허구적인 장면이 허구로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적으로 색다른 배경 속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매 단편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이기 때문에 독서에 부담은 덜하지만, 세계관이나 비유, 캐릭터는 각각 색다른 매력을 안겨준다. 그래서 어떤 단편은 쉽게 내막을 파악하기 어려워 몇 번이고 읽게 한다. 그 과정이 번거롭기보다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정확히 알고 싶게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책의 제목과 같은 「기린의 심장」이 바로 그 예이다. 이야기는 '지금까지 누구에도 말해준 적 없는 이야기'라며 운을 뗀 경찰관 K가 유치장에 들어온 무명작가 '나'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경찰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로 심한 업무 부담을 느끼던 K는 업무 도중 실수한 후, 버스를 탔다가 처음 보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기린, 그 기린과 함께 다니는 소녀는 온통 낯설기만 하다. 이후 만나게 된 두 노인에게서 2698대의 동물원 관리자라는 소개를 듣고, 이 동물원 소유주에 대해선 세계에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분이라며 이름까지 비밀로 붙인다. 소녀는 아픈 어머니의 약을 짓기 위해 기린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하며, 두 노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출입도 자유롭지 못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K는 기린의 심장을 두고 선택을 해야 했다.
과연 소녀는 누구고, 무엇을 의미했고, 기린의 심장은 무얼 나타낸걸까? 동물원은 어떤 곳이기에 K와 소녀, 기린, 동물원 관리자인 노인들, K처럼 이곳에 왔던 시험자를 붙들인걸까? 다 읽고 나서도 감을 잡을 듯 말 듯 한 소재였다. 동물원에서는 마음이 지워지면 사라진다는 대목에서 인간의 감정이나 기억 등으로 유추해보기도 했다. 아리송한 만큼 다른 해석을 맛볼 수 있는 부분이고, 업무 부담에 힘들어하던 K가 선배의 무얼 하고 싶냐는 물음에 '잠을 자고 싶다'고 답하는 내용 등 현대 사회의 씁쓸한 면모도 찾을 수 있다.
가장 파악하기 쉽고, 부조리한 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보이는 단편은 「라하이나 눈」이었다. 여기서는 '육체 동기화'라는 특이하면서도 미래에 있을만한 기술을 소재로 하고 있다. 육체를 동기화하는 기술은 감각 외에도 물리적 상태와 심리 분야로까지 확장할 수 있으며, 동기화 범위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운동이 필요한 환자가 있지만 이 사람이 운동할 수 없는 상태일 때, 누군가 이 사람과 동기화하여 환자 대신 운동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은 꾸준히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 그림자 속 어두운 마음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달리기라 믿었던 것이다. 이 특기를 살려서 유명 대기업 오너의 셋째 아들, 최근 실력을 인정받은 여배우와 신체를 동기화하여 대신 체중 감량 및 적정 체중 유지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계약기간이 종료되고 앞의 유명 대기업 오너의 셋째 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덕분에 건강한 몸을 갖게 되어 고맙다며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무절제한 식사로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동시에 꾸준히 운동해야겠다는 다짐을 남기지만, 주인공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이들은 돈으로 산 건강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여 다시 육체를 동기화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주인공에게 고도비만인 두 명의 청소년 사진을 내민다. 미성년자는 불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주인공의 아내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자기 집안의 소유이며 여러 가지 특혜를 주겠다는 말에 주인공은 계약을 해버리고 만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육체를 동기화한 바람에 죽은 지인을 보고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후 일어나는 주인공의 삶, 라하니아 눈의 의미, 그리고 마지막 결말까지 재산과 관련하여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과정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속에 숨은 소시민의 삶이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기린의 심장>은 부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인물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보다는 다양한 세계관, 특이한 소재와 비유를 통해 그대로 꺼내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언급하지 않았던 다른 단편 속의 이야기와 독특한 내용을 살펴보고 싶다면 독서를 권하는 책이다. 하나하나 직접 캐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