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이 섰다.
문이 열렸다.
정거장도 아닌데,
아무도 내리지 않고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저 동네 아줌마들과차장의 수다만타고,
내린다.
대단한 무언가를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찌면 이렇게아무것도 아닌 것을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p37)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다. 동시에,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p81)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모든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그때그때 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브라운이 말했다. ‘인생이란 책에는 뒷면에 정답이 없다고, 정확하게 같은 결론이다. 여행이란 책에도 정답은 없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나의 선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p82~83)

타인의 취향은 안전하다ㅡ.

블로그와 인스타그램과 구글을 몇 개월간 넘나들며, 핸드폰 지도앱에 수백 개의 발표를 쳤다. 맛있다는 추천에, 예쁘다는 추천에 싸다는 추천에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추천에 별은 끝없이 번식했고
어느새 은하수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만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동방박사도 아니면서 별을 따라 목적지에서 목적지로만 이동하다 보니어느새 나는 여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안전한 곳만 찾아다니다 보니 모험의 즐거움을 놓쳐버린 것이다.
나는 결코 안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

별들을 지나쳐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관광객이 결코 찾아들 리 없는 동네 실비 집으로 들어갔다.
영어 메뉴판도 없는 곳에서 도박하는 심정으로 주문을 마치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침내 블랙홀을 빠져나온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은하수가 아니었다.
나만의 견고한 별 하나였다. (p137)

행복을 향한 몸짓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여행말고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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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한 친구와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던 건 시정거리가 3미터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그건 단순한 기상현상이아니라 부유하는 상실의 덩어리와 같았다고 세진은 회상했다. 술집에서 친구가 들려준 위로의 말들은 헛되이 사라졌는데, 안개 속을 걸어가는 일만은 무엇보다 위안이 됐다고. 대기 속에서 순환하는 바람들과 물방울들과 따뜻하고 차가운 공기들이 그를 감싸고
‘괜찮아, 다 괜찮아‘ 속삭이는 느낌이었다고. 그리하여 안개 속을걸어가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고통과 불안은 서서히 사라졌고,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세진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건강하고 젊은 그들에게 고통이란 다른 세상의 일들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젊고 건강했으나 지난 몇 년의어느 순간에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면서 나는 고통의측면에서는 800년 전의 옛사람과 같아졌다. 말하자면 나는 단테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은 개별적인 고통이 어떤 것인지구체적으로 밝히는 건 중언부언일 뿐이리라. 항암약물투여실 병상마다 앉거나 누워 있던 모든 암환자들의 고통이 그렇듯, 나의 고통 역시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세상에 널린, 흔하디 흔한 고통이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는 유행가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곤 했는데, 이제는그 통속적 모순의 세계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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