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범죄 열림원 이삭줍기 19
D.A.F. 사드 지음, 오영주 옮김 / 열림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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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120>의 지독한 성애묘사 때문에,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포르노 작가 아냐?"하고 착각하게 할 정도의 논란이 많은 작가 사드의 단편집이 번역되어 있다고 해서 찾아 읽게 되었다. 

 나는 1993년판 이형식이 번역한 작품집을 읽었다. 현재 절판되고 이 책이 2006년에 다시 번역되어 나왔는 것 같은데....그렇다면 똑같이 다섯 편 다시 번역해서 출판하지, 또 두 편은 왜 줄여서 번역했는지...우선 난 그게 불만이었다.(가뜩이나 오해를 몰고다니는 사나이 사드의 작품을. 차라리 가감없이 다 보여주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텐데....)  

제목도 1993년판 그대로 <사랑의 죄악>이 나은 것 같다. 미덕과 악의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의 양면성을 사드가 얘기하고자 한 듯한데, '범죄'라.... 그보다는 '죄악'이 낫다. 신앙의 문제도 나오고 하니. 

옮긴이는 서두에서 "인간에게 비정하기 그지없는 운명의 잔혹한 작위와 사회적 통념 혹은 관습에 대한 반항"이 이 단편집의 골격을 이룬다고 했는데....글쎄...난 5편에 나오는 근친상간, 성도착, 살인, 미덕의 화신들이 겪는 운명의 박해를 접하고 나서, 사드의 작품을 단순히 '반항'이라든가  '사회 비판'으로만 개괄하는 것이....자꾸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사드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비판, 관습을 비판하는 내용은 물론 간간이 나온다. 이를테면, 

"나는 파산했으며 더 이상 명예라는 것을 가질 수 없어요. 내가 감옥에 갇히고 악당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악당만이 결국 자유로운 이상, 억압 속에서 움츠리고 살며 악당일 것이라는 의심을 받느니보다는 인간의 모든 기본권을 향유하며 실제로 악당이 되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소?"(팍스랑즈, 혹은 야망의 죄) -  사촌오빠와 사랑하던 사이이던 팍스랑즈가 한 순간의 허영심에 사로잡혀 연인을 버리고 돈 많아보이는 프랑로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는데, 알고보니 그 사내는 한국으로 치자면 무자비한 산적 두목이었다. 프랑로가 자신의 사연을 팍스랑즈에게 설명하는 가운데 나오는 대목이다.

"명예심이라는 것,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그토록 존귀한 그 감정이 우리 여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남자들 사이에서는 결투를 각오해야만 하는 모독 행위가 여자를 상대로 할 때는 여자가 오직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으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희생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의 생명을 천 번이라도 바치려 했던 사람에게 기만을 당한 것입니다."(플로르빌과 꾸르발, 혹은 숙명) - 아름다운 플로로빌이 16세에 연정을 바친 사내에게 임신하고 버림 당한 사연을 꾸르발에게 얘기하는 도중에 나온 대목이다. 

"별 재주나 자격없이 출세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세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거에요."(도르쥬빌, 혹은 미덕 때문에 죄를 짓게 된 사나이) - 관대한 인품을 지닌 도르쥬빌이 임신한 채 떠돌던 아리따운 여인을 도와주다 자신이 그 여자에게 사기당한 것을 알게되었을 때, 그 여자가 한 말이다.   

"남자에게 속해 있는 여자라는 존재는....."  프랑발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관습이 우리에게 예속시킨 일종의 개체인 것이오. 여자는 부드럽고 고분고분하며....행실이 단정해야지요. 물론 여자의 부정에 대한 일반의 편견을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인이 남편의 문란함을 모방한다고 한들 남편에게 무슨 상관이겠소. 다만 다른 남자가 자기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싫을 뿐이지요. 그밖의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의 행복에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남자의 생각이 그러했으므로 그에게 시집올 아가씨의 앞날에 장밋빛 행복이 그녀를 기다릴 리 없다는 사실은 넉넉히 짐작되는 바다.(으제니 드 프랑발) - 허우대가 멀쩡하다 못해 아주 잘생긴 희대의 미남 프랑발이 자신의 아리따운 딸을 자신의 성노예로 키워나가는 얘기이다. 그러한 프랑발의 여성관을 잘 압축시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사드의 서술은 은폐된 암흑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는 않았다. 마치 그래서 인간이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미덕"의 문제라고 하는 것처럼. 예를 들면, 

프랑로는-이 사실은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자기의 서글픈 부인에게 얼마간의 평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가 편안히 쉬도록 내버려 두었다. 악당들의 영혼에도 약간의 착한 흔적이 있게 마련이며 미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큰 가치로 부각되는 법이기 때문에, 극도로 부패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미덕에 경의를 표하는 경우는 허다한 것이다.(팍스랑즈)  

도르쥬빌은 몹시 심하게 앓고 나더니....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었으면서도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형성하고 있던 선량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끝내 깨뜨리지 않았으며, 자기 생애의 치욕이며 자기를 죽게 한 유일한 원인인....그 가련한 여인을 향하여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열렬히 태우던 사랑의 불길을 끄지 못하였다.    오! 이 이야기를 읽으실 이들이여, 우리가 저버리는 순간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그 신성한 도리를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겠다는 절대적 의무감이,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우리들 속에 태동하기 바란다. 첫 제약을 깨뜨리는 순간 느끼는 회한에 제어되어 우리가 그 상태에서 스스로를 억제한다면, 그 미덕의 권리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리라.(도르쥬빌)  

사회에 통용되는 관념과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가, 당시 기득권 세력들이 그만한 권한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당시 남자들에게 여자는 질투를 일으키거나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존재도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쾌락의 性적 대상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여주다가도, '미덕이라는 것이 순진하게 악에 당하는 순간 조차에서도 결국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미덕의 찬연함'이라는 서술을 하고 있어서....사드가 단순히 미덕을 부정했다거나 종교적 신앙심, 우아함, 관대함과 같은 인간의 여러 가지 덕성들을 거짓이라고 비판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으제니 드 프랑발>에서 성직자가 말하는 대목을 보면, 어떤 일을 두고서 죄냐 미덕이냐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프랑스 사회에서는 선이고 다른 곳에서는 악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근친상간이 합법적인 나라도 있지만, 단지 관습의 차이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하니, 절대 선이란 없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풍토의 사회적 관습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존재 양상과 관련된 한 국가적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며, 자연이 그것에다가 우리의 의무를 깊이 새겨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할 경우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을 보면, 분명 현행 관습과 사회적 법률이 불합리한 점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프랑발처럼 모두 허위라고 한다면, 인간이 근친상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도 허위가 되지 않겠는가? 인류 사회의 모든 관습과 도덕이 허위여서, 아버지가 딸을 취하고, 오빠가 누이를 취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취하고,  <쌍세르 백작부인 혹은 딸의 연적이 된 어머니>에서처럼 어머니가 딸의 연인을 취하려고 한다면.....기본적인 "사회"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되는데....사드는 성직자의 입을 빌어 분명 이런 문제까지 거론하고 있다.  답은 내리지 않고 문제를 던지기만 하지만. (<플로르빌과 꾸르발>의 작품을 보면, 플로르빌이 극단의 두 여인을 거쳐가게 되는데, 하나는 성모 마리아같은 여자이고 하나는 탕녀이다. 사드는 이 두 여인의 입을 빌어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공방을 벌이는 대목을 슬쩍 배치하고 있는데....근데....쉽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간혹 헷갈리는 대목도 있어서. 정말 사드가 미덕의 편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지....확신이 안 선다는 말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읽혔다.)

일명 포르노 작가(^^;) 사드는 분명 "미덕"의 가치를 절실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5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작품집이 사드를 이해하는 데 그나마 좀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아마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간혹가다 소설 가운데 "꿈"에 관한 자신의 생각이라든지 "애정"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인 사견들이 (  )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이를 테면,

("오! 내 사랑이여, 그대가 사랑하는 이 몸을 타락시키려 하지 마세요. 그러시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자기를 유혹하려는 연인에게 어느 날 다정다감한 여인이 그렇게 말하였다.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그대가 하신 말씀을 여기에 인용함을 허락해 주오. 그 말씀은 얼마 후 연인의 생명을 구출한 여인의 영혼을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의 미덕이 한 자리를 확보해 준 역사의 성전에 그 감동적인 말씀 하나하나를 새겨 두고 싶소이다.) - 성애 묘사의 대가 사드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솔직히....나는 내심 놀랬었다. ^.* 

이런 것을 보면 사드가 단순히 性을 통한 사회비판, 인간비판을 얘기한 작가에 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미덕은, 특히 당시에는, 설교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기 쉬운데, '인간이니까 - 해야 한다." "성서에서 - 하라 하셨다" 등. 그러나 사드는 논란을 일으키는 인간의 죄악과 사회적 양상들을 보여주며 "미덕"에 관한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교를 통한 미덕에의 접근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미덕에의 접근같은...

그리고 사실 충격적인 것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아주 우아하고 품위있으며 남녀 모두 세상에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팍스랑즈 아씨의 나이는 갓 열여섯이었고, 용모의 윤곽선마다 미덕이 넘쳐 흘러 낭만적이었고, 피부는 매우 희고 아름다운 푸른 눈에, 유연하고 날아갈 듯한 몸매 그리고 머리채 또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기지는 성품만큼이나 부드러웠고, 어떠한 악행도 저지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마디로 우미의 여신들 손으로 치장된 천진스러움 그 자체였다."(팍스랑즈, 혹은 야망의 죄) - 그런데 이런 여자가 결국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던 이를 버리고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프랑로에게 속아 시체말로 인생 망치게 된다.

"플로르빌 아씨의 나이는 서른 여섯인데, 외양은 스물여덟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자태만큼 서글서글하고 귀여운 모습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윤곽이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고 살결은 백합꽃 같으며, 그녀의 젖은 듯한 입술은 무척이나 아름다우며, 봄날의 장미를 연상시킵니다."(플로르빌과 꾸르발, 혹은 숙명) - 이런 플로로빌이 오빠와 근친상간을 해 아들을 낳게 되고, 또 그 아들이 플로로빌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연정을 품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그러한 아들을 죽이게 되고, 자신의 생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당하게 하고, 그 많은 사연을 거치고 안식처로 택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라는 잔혹한 숙명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플로로빌은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모두 겪게 되는 운명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젊은 도르쥬빌은 몸매의 우아함에서만은 별로 행운을 타고 나지 못하였다. 그에게 불쾌감을 줄 만한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 중 흔히 '미남'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성은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르쥬빌이 그러한 측면에서 갖지 못한 특혜를 자연은 다른 측면에서 보상해 주었다. 천재보다 더욱 값진 훌륭한 기지, 놀랄만큼 섬세한 영혼, 솔직하고 신의 있으며 진지한 성품 등, 한 마디로 선량하고 인정많은 사나이로서 필수적인 모든 장점들을 도르쥬빌은 고루 갖추고 있었다.(도르쥬빌, 혹은 미덕 때문에 죄를 짓게 된 사나이) - 이런 도르쥬빌은 철저하게 가짜 쎄실에게 농락당하게 된다.

*아....여담이지만, 쪼금 짜증났다. 사디즘을 알린 것이 <소돔120일> 때문인 줄 알았으나, 불문학 전공자에게 들으니 <두 자매 이야기>때문이라 한다. 한국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줄거리를 들어보니 앞으로도 번역 안 될 것 같았다. 사드 연표를 보니 쥐스띤느와 줄리에뜨? 이런 작품이 있던데, 아마 원래 제목인 것 같다. 언니 줄리에뜨는 창녀로서 당시 프랑스 모든 계층의 사내를 상대하며 오히려 그들의 性을 가지고 놀지만, 동생 쥐스띤느는 플로르빌같은 여자인데, 당시 프랑스 모든 계층의 사내에게 능욕을 당한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여지를 남기지 않는가 하면, 맨 마지막에 한국으로 치자면 일지매같은 의적(!)에게 능욕당한다고 한다. 아....짜증나! 짜증나! 원래 문학에서 의적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性의 문제에 있어서 사드는 너무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단지 성직자, 교황, 귀족, 국왕의 타락을 비판하는 선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뱃사공, 부두 노동자부터 허우대 멀쩡한 우아한 외양의 인간, 미덕의 인간까지 다 포함된다는 말이다.) 플로르빌과 도르쥬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억울하여(!) , 갑자기 <두 자매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흠....그러니까 사드가 두 번 죽음을 당했겠지. 한 번은 귀족에게, 그 다음은 부르조아에게.  <미덕의 불운>으로 1988년에 번역된 것이 있다는데...그것이 쥐스띤느 이야기인지 찾아봐야겠다. 

다섯 편 모두 인간의 미덕과 악, 관습과 관련된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또 각 이야기의 끝은 각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는 한다. 인간에게 고상함, 우아함, 관대함 등의 성품과 사회적 관습과 법률은 분명 중요한 것이긴 한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어서 사드는 독특한, 아니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있어 예외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미덕의 화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허영에 유혹당하고, 근친상간에 눈 멀어 자기 딸을 죽이거나 아내를 죽이거나 하는 것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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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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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에 이어 읽게된 유르스나르의 작품이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번역자에 따라 <최후의 일격>이라 하기도 한단다.

(다른 리뷰를 보니 불어를 할 줄 아는 분 같던데, <자비의 일격>이라는 뜻이란다.

참고로 나는 불어를 고교 때 제2외국어로도 안 배워본 아시아쪽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

 

사실...유르스나르 작품의 대부분 소재가 이런 것인 줄은 몰랐었다.

<알렉시>를 다 읽었을 때에도 <세 사람>마저 연관된 주제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드리아누스 회상록> 속의 동성애 문제는, 워낙에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리스, 로마에서는 동성애, 양성애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것이었고,

(소크라테스의 글을 보다가 잠깐 '이건 뭔가?'하는 생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도 그렇고 <파이드로스>도 그렇고,

그 심오한 철학 얘기 속에서(^^) 묻어나오는 도시 국가의 생활상에....

자못 당황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알키비아데스, 이 놈이 당시 난 놈이더구만.

궁금하면 한번들 읽어보시길. 당시 그리스의 중년 남자들이 성인이 되기 전의

미소년들에게 그렇게(!) 연정을 품었더구만. 오늘날의 점잖은 철학 전공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와 다르지 않았을까 주석을 달아두었지만, 글쎄...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sexual한 관계까지

 간 것 같던데...?(고대인들이라고 그렇게 점잖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성애의 역사는....생각보다 오래되었다. ....태초부터...그랬을까...?) 

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서는 동성애 문제가 주된 포커스가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할까?

 

<세 사람>은 <알렉시>보다 한결 복잡하다.

단순히 남성 동성애자 남편과 이성애자 부인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성 동성애자 남자(에릭)에게 자신을 던지는 이성애자 여자(소피)와

남성 동성애자의 연인이 바로 그 여자의 오빠(콘라드)라는 점이다.

-_-...... 읽기 전부터 긴장은 했었지만,

 어휴...사랑은...아무나 못한다.

역시 대충의 줄거리는 다른 분의 리뷰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중언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알렉시>의 리뷰에서,

우정이라면 모를까, 남성 동성애자에게 행여나 연정은 품지마라고 한 말,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성애자 여성인 탓에, 비록 글은 에릭의 고백으로 전개되지만,

에릭의 눈에 비친 소피의 그 열정 부분을 읽기란....어후, 솔직히 내가 다 힘들었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이면서도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에릭,

'이 시니컬한 놈!'하고 생각 했다가도, 그는 자기 말대로,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데 자신을 사랑해주

는 여자를  최대한 공손하게 대했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성분들이여, 명심하시라.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 여성분들이 발산하는 그들에 대한 열정 앞에서

나르시즘을 더해갈 뿐 아니라, 심지어 역겨움과 반감을 가진다는 것을!

(가령, 본인은 마음에도 없는 남성이 "백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없다"는 태세로 구애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는가? "백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도 있다"는 것을 단단히 가르쳐줄

태세로 거부하지 않는가? 에릭과 소피의 관계가 딱(!) 그렇다./ 물론 상황에 밀려서 구애를 받아들

이게 되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알렉시>에서는 좀 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동성애자의 형상을 느낄 수 있었다면,

<세 사람>에서는 남성 동성애자의 여성 혐오증(단순히 나의 감상에서 지어낸 표현이 아니라, 유르

스나르를 전공한 오정숙 교수가 소개한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 영원한 방랑자>(도서출판 중심,

2007)에서 나온 말을 인용한 것임)까지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그런 에릭에게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소피.

"왜 여자들은 자기네들에게 운명 지워지지 않은 남자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남자들

에겐 몹쓸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그네들을 증오하거나 할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말

이다." - 소피를 바라보는 에릭의 속마음이다.

 

모티브는 똑같이 남성 동성애자의 고백인데,

<알렉시>와 <세 사람>이 주는 느낌은, 사실 너무 달라서....

내친 김에 오정숙 교수의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영원한 방랑자>까지

결국 빌려보고 말았다.(-_-; 내가 지금 프랑스 작품을 볼 때가 아닌데...)

(오정숙 교수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유르스나르에 관한 소개책을, 과연 누가 읽어볼까? 더군

다나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걱정하던데...^^* 희망을 잃지 마시라.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1편이라

도 읽어보게 되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책도 이렇게 같이 찾아서 읽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만큼 유

르스나르의 작품은 낯선 한국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성인 유르스나르가 어떻게 남성 동성애자의 목소리로 이런 주옥같은 작품들을 쓸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유르스나르 자신이 레즈비언적 성향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 젊은 시절, 스스로가 남성 동

성애자를 사랑하기도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시각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흠....유르스나르의 작품과 관련해서 소개된 작가의 연대기적 삶은

덕분에 <알렉시>와 <세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기는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은...

유르스나르는 작자 서문에서 집필 동기를 밝히기를,

작중 인물들의 타고난 고귀함 때문이라고 했다.

귀족 계급의 신분적 고귀함이 아니라, 타산적 계산의 철저한 부재를 고귀함이라 정의하면서.

(실제로 유르스나르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문제는...내가 너무 동성애/이성애, 이런 것에 혹 하다보니 좀 더 깊이있게 읽어내질 못하겠다는

점! 단순히 동성애 문제는 아닌데...모르겠다...

(혹 했다고 해야겠지? 이제 좀 이해가 된다. 아시아인의 많은 배낭 여행담에서, 서구쪽 동성애자들

의 관심에 당혹스러워한 경험이 왜 그렇게 많이 회자되는지를. 일본쪽은 전혀 모르겠고...중국이나

한국의 고대 문헌에서,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 있었는지...잘 모르겠는데...황제나 왕들의 향락적인

생활말고, <알렉시>나 <세 사람>에서와 같은 그런 동성애 말이다.)

우선 나에게 남아있는 과제를 끝내고서,

다시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때는 제대로 읽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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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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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을 전공하신 분이 소개해 주셔서 우연히 알게된 유르스나르의 작품들.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고, 난 이 분이 아니었다면,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단 1편도 읽지 못한채 인생을 마감할 뻔 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라고 해서 앞 부분만 잠깐 보다가 덮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고백체의 문투에,

문장 하나하나에 인간의 진실(햇빛이나 달빛처럼, 신분 나이 성별 재정적 상황에 상관없이 누구나 나눌 수 있는 것)을 담아, 로마의 실존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작가적 통찰을 쏟아붓는 작가의 그 굉장함(! 아직 유르스나르에 대해 잘 모르므로, 위대하다는 말까진, 감히 못쓸 것 같아서)에 눌려서, '이렇게 짬짬히 읽을 책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일단 접어둔 것이었다.

그래서 동학에게 유르스나르 얘기를 했더니,

도서관에서 <알렉시> 와 <세 사람>을 제본(항간에는 도둑질이라고 난리치지만, 한국적 현실에서 보다시피 이미 절판되었고, 비좁은 서재에 반드시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을 일게 하는 작품이라 부득이하게 한 일이었다)해 와서 나에게 주었다.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의 1/3분량이라 일단 시도했다.(밤에 자기 전에 1-2시간 시간내서 읽었다.)

역시!

유르스나르...이 여작가, 심상치 않은 작가다.

난 국문과 출신도 아니고,

인문학을 한답시고 남들에게는 그렇게 소속을 밝히지만,

여러 나라의 문학작품을 다양하게 섭렵한 그런 교양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이렇게 글을 써내는 여작가는, 난생 처음 본다!

 

주인공 알렉시는 남성 동성애자이다.

이 작품은 이 알렉시의 목소리에 의해 전개되는 전기체 소설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은 물론이며,

동성,이성애자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성찰을 고백한 그런 소설이다.

기본 줄거리야 다른 분의 리뷰에도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고,

내가 신선하게 여겼던 것, 책을 덮고서도 잊혀지지 않았던 점을 얘기하자면,

본문에는 '동성애'라든지 화자 자신의 '취향'이라든지 하는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시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음악가인데,

그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하고,

이성애자 부인 모니끄를 맞이하여, 아이까지 낳고 2년을 살았지만,

더 이상 부인에게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편지를 통해 이별을 고하는 그런 남자이다.

 

남성 동성애자가 이성애자 부인에게 하는 고백의 말,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소."

모니끄는 유럽 상류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답고, 조신하고, 따뜻하고, 사려깊고, 교양있는 가문 출신의 여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조차도 알렉시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그 큰 사랑을 요구하기를 포기했었소. 틀림없이 그 사랑을, 내가 당신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여인도 내게 일으키지 못할 것이오."

"나는 당신에게 애착했던 것이오. 나는 애착했소. 불행히도 적절한 말이라곤 이 말밖에 없소."

 

어떻게 여성 작가가 이런 남성 동성애자의 마음을, 더군다나 고백체로 써낼 수가 있었을까?

동성애자도 인간이야! 라고 외치는 어떤 영화나 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난 130쪽 분량의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진짜 속마음을 말이다.

"동성애자도 인간이야."라는 것은 굳이 말이나 표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된다.

<알렉시> 1편이면.

 

최근 <앤티크:서양골동양과자점>같은 영화로 여성 관객을 사로잡았다고 떠들던데,

글쎄...? <앤티크>같은 영화로 단순히 남성 동성애자를,

잘생긴 남자들, (CF카피대로)완벽한 남자들로만 생각하는 여성분들이라면, 

유르스나르의 <알렉시>, <세 사람>을 연타로 읽어보시길.

진지하게,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보시길.

그리고 우정이라면 모를까, 행여나 남성 동성애자를 (알면서도) 사랑하는 불상사는

스스로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길!(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임. 그 이유는 <세 사람>의 리뷰에서...)

 

 *부언

언젠가, 학교에서 발행되는 소책자에서 성적 소수자 문제에 관한 글을 읽어본 기억이 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내려오는 그런 종가집의 종손이었는데,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교적 틀에서는 여자 뿐 아니라 남자들도 반드시 결혼은 해야 한다.(내가 중학교 때 함수를 배우면서, x와 y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옛날 사대부가의 여인들은, 시집을 안 갈 수도 없었고, 두 번 갈 수도 없었다고. 그것이 마치 x와 y의 함수 관계 같다고.) 그것은 뼈대있는 사대부 가문의 남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자손을 낳아 대를 잇고, 조상을 모시는 것이 법도이던 시절이었기에, 유럽의 귀족 출신에는 역사적으로도 독신자가 많았지만, 글쎄, 난 아직 사대부 출신으로서 독신자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출가를 제외하고.)

그래서...궁금했다. 그 남학생은 어떻게 할까? <세 사람>에서의 에릭과 같은 마음일텐데, 종손으로서 동성애자라고...용기있게 부모님께 가문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부디 그가 <알렉시>처럼 살게 되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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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오해 알베르 카뮈 전집 1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미안. 내가 널 오해했나봐."

우린 보통 이런 의미에서 "오해"라는 단어를 쓴다.

남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러나 이 이면에는, 남이 선의로 한 말을 악의로 받아들였다 할 경우, 선의와 악의의 차이가 뜻하는 것은, 서로의 의식 자체가 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단순히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얼핏보기에 이 작품은 , 마르타(여동생), 어머니, 얀(오빠), 마리아(얀의 부인)라는 주인공들이, 서로 오해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다시 찬찬히 갈등 구조를 살펴보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오해란, <공동의 무엇이 부재함>을 뜻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오해를 통해, 까뮈는 "진정 터무니없음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중남부의 황량하고 인적이 드문 고원지대의 여관 주인 부부가 여행객들을 살해하고 돈을 뺏은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한다.(붉은 여관이라고...오베흐주 흐쥬?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일종의 설화 같은 것이라고 한다.)

1 막: 공동의 인식이 부재하는 두 쪽 간의 대면

엄마와 마르타가 손님으로 온 얀(어릴 때 헤어진 아들)을 죽이고 한탕하자고 할 때,

마르타: 아! 어머니!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하늘 끝조차 보이지 않는 이 땅을 떠날 수 있게 되면, 이 여인숙도, 일년 내내 비만 내리는 이 마을도 버리고, 이 그늘진 고장도 잊어버리고, 마침내 그토록 꿈에 그렸던 그 바다를 눈 앞에 대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어머니도 저의 웃음짓는 얼굴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르타는 현실에 반항하며 인생역전의 욕망을 위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 살인이 정당한 동기가 되지 못함을, 터무니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스스로를 오해하고 있다)

어머니:(중략)그러나 죄짓는 일이 두 번째면 그때부턴 벌써 습관이 되는 거란다. 처음 짓는 죄란 시작도 아냐. 그것은 그것으로 끝인 거다. 그런데 설령 기회가 아주 드물었다 해도, 그래서 여러 해에 걸쳐서 저지른 것이라 해도, 기억이라는 것이 습관을 단단하게 만드는 거다. 그래 맞아, 내가 그 남자를 응대한 것도, 그 남자(아들, 얀)가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도 모두가 습관이야.(살인의 동기가 습관 때문이라는...아주 무시무시한 살인의 이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습관으로 인한 살인"이라는 진실을 말해준다.)

얀: ...그 다음일은 신께 맡기면 돼요. 그러지만 내가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당신(부인, 마리아)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신도 알고 계세요. 다만 사람은 유배나 망각 속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거요.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소. 나는 내 고장을 되찾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소.(고향을 떠나 태양이 빛나는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고향에 남겨진 가족 생각에 마르타와 어머니를 찾아 유럽으로 넘어와서, 이들에게 "저에요" 바로 말하지 않고, 어떤 말을 통해 자신이 아들이고 오빠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인물. 얀이 가족을 찾아 떠나온 그곳은, 바로 동생 마르타가 살인을 통해 차지한 돈으로 가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이상적인 곳이다.)

이렇게 양쪽은 각자의 오해 속에 빠져서 대면하게 되는데...

2막: 공동 언어의 부재

얀: 난 아직 그 말 못 찾았어. 근데 괜찮아.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는 이 집에 재산을 가져다주러 온 거야. 가능하다면 행복도 말야. 내가 아버지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두 모녀에게 내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근데 말처럼 자기 집에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어떤 이방인의 아들 행세를 하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마리아: 당신은 이방인의 아들이 아니라 이 집의 아들인데 왜 본인이 아닌 행세를 하려해요.

 

마르타: 설령 아들이 이 집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아무 손님이나 이 집에서 확실히 받는 것을 받을 거에요. 말하자면 호의적인 무관심 말이에요.(캬~!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말. 왜 굳이 여관을 설정하고,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게 했는지 짐작가능하다.)

 

얀: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한 분은(어머니) 이해로, 다른 한 분은(마르타)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거죠?

마르타: 찾아오신 손님으로서야 그 이상 무엇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얀: 그렇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야겠군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집에서는 이야기도 사람들도 모두 이상하게만 느껴지는데, 그 점 알고 계신가요? 이 집은 정말 이상해요.

마르타: 그건 손님께서 이상하게 행동하시니까 그렇겠죠.

 

어쩜....고독한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엇갈릴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지! 고독한 두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나눌 게 없었다. "고독이란, 서로간에 아무런 나누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3막: 공동 믿음의 부재

얀: 그래도 나는 조금은 돌아온 자식을 위한 만찬을 기다렸는데, 세상에, 돈 받고 맥주를 주는 거야.

이 말을 한 그날 저녁, 결국 얀은 독을 탄 차를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얀이 자신의 아들이자 오빠임을 안고 난뒤, 공모자였던 엄마와 딸은 그 공동의 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어머니: 그러나 지금에 와서 깨달았다마는,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할 것 없는 이 땅 위에서도 우리에겐 우리의 확신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듯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지금 나의 확신이다.

마르타: 불의에 고통받고 있는데 누구도 나를 옳게 봐주진 않았어. 나는 무릎꿇지 않을거야. 천만에. 이 땅 윙에서 내 자리는 박탈당한 채, 어머니로부터는 버림받은 채, 내 죄들 한 가운데 홀로 남은 채, 나는 이 세계를 떠난 거야. 하지만 아무런 화해없이 이 세상을 떠날거야.

이제...마르타는 오빠의 죽음과 어머니와의 공모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도 신밖에는 찾을 게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르타가 신을 찾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것은 결국 "사람들이 신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세계"를 증오한다는 말이 된다. 남편 얀의 죽음을 알게된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지막 대화,

마리아: 내게 손대지 말아요. 당신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마르타: 그러지 않아도 내버려두려 해요. 그러는 것이 나에게도 마음 편하니까요. 당신의 그 사랑이니 눈물이니 하는 것 견디기 힘드네요. 그러나 당신이 아직도 내가 옳다, 사랑이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고이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도록 놓아두고 죽을 수는 없어요. 왜냐고요? 이제야 우리는 질서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니까요. 이 점을 수긍하셔야 될 거에요.

마리아: 무슨 질서요?

마르타: 누구도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질서요.

사람은 물론 신마저도 인정받지 못하는 질서, 즉 아무도 인정받지 못하는 곳, 이런 세계는 공동의 믿음은 더 이상 없는 곳이란 뜻이다. 마리아같은 사람에게 공동의 믿음, 공동의 집은 신이지만, 마르타같은 사람에게는, 공동의 믿음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은 결국 무서운 고독 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집은 곧 "죽음"이다.

인간의 고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실이지만, 터무니없다. 아무도 이를 그냥 순순히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고독을 극복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각자의 고독에 대해서, 외로움에 대해서 반항은 해야 함을 알려준다고나 할까? 인간이란 고독하다는 진실을 용납할 수 없으니, 반항은 해야 한다. 정말로 고독해서 반항을 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에게 어떤 지평이 열릴지는 모르니까. 최대한의 반항을 통해 인간사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해야하는 것이고...그냥 무책임하게, 가식적으로 신을 통해 그 고독을 해결하려 하지도 말고...

고독이란, 서로간에 아무런 나눔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우리는 고독을 통해 생각을 해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 고독의 무서움을 절감했을 때, "고독"만이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구나 했을 때, 남의 고독도 알아보고,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만나려 하고...

결국 고독을 이해한다는 것이, 사람 사이의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굉장하다...!

인물간에 주고 받는 대사 하나하나가,

굉장하다.

이 담에 학위마치면, 까뮈 전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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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 [초특가판] 아웃케이스 없음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미후네 도시로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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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생문>과 <대숲에서>를 원작으로 한 영화.

명성만큼 굉장하다. 아쿠타가와 작품을 먼저 읽고 봤는데,

감독 자체가 작품을 잘 해석한다는 느낌을 줘서

소장까지 하게 되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인간사의 진실을,

어쩜 이렇게 잘 보여주고 있을까?

홍상수의 <오!수정>이 이런 시각에서 만든 영화라고 하던데,

비할 바도 아니더구만.

요즘 나오는 한국의 다장르 영화(코믹,멜로,액션 종합)는 새로움을 시도함에도

진부하게 느껴지고, 이 영화는 그렇게 오래되고 흑백 영화인데도, 왜 이렇게 새롭게 느껴질까?

옛 것 그대로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 이런 영화가 명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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