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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우리의 마지막 기도
나는 노란 바탕에 가운데 북, 그어진 검은 틈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관통」에 등장하는 미온처럼 이 책을 '관통'한다. 당혹스러운 세계들. 하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든다. 그래서 방황한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버리는 게 되는 걸까요? (「어디까지를 묻다」, 270쪽)
이렇게 물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계속 책장을 넘겼다. 잠을 설쳐 악몽을 연달아 여덟 번쯤 꾼 것 같다. 하나같이 다 무서운 꿈이지만, 다른 형태로 변주되는 꿈을 한바탕 꾸고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덮었는데 이제는 빠져나갈 검은 틈새가 없다. 나는 갇혀 버렸다. 아마도 되돌아올 길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들, 하지만 누구나 은폐하고 싶어 하는 사실들을 구병모 작가는 8편의 작품에 걸쳐 다른 플롯으로 바꾸어 가며 말한다.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몇 가지 매뉴얼이 있는 것 같다.
1.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는 제목처럼 이기적일 것.
2.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을 것.
3. 단, 자신감은 나보다 더 못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을 보며 키울 것. 열등감 역시 더 못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을 보며 극복할 것.
이것이 생존 법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서 살고 있고, 반드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적응해야만 그럴 듯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기본 예의로 알고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이중적인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다.
다시 한 번, 2번과 3번은 참 모순적이다. 더욱 정확한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겠다. 「이창」에서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다른 가정의 가정 폭력 실태에 대해 고발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 한다. 죄목은 '남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적 역시, 남이 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간섭 아닌가? 나는 뚜렷한 경계를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남에게서 신경을 끄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남을 이용해버리곤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도덕 시간에 이런 것들을 배웠다. 이기주의가 만연해지고 있고, 우리는 남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생활하는데 세상은 정반대의 것들을 가르친다. 세상이라는 말은 좀 모호하다. 어느 단어가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와 일적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 정도로 해두겠다. (이 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은 남 위한다고 하는 것들은 죄다 위선적인 것이고, 우리는 어차피 이기적일 거 제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똑똑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안주거리 삼 아 씹어댔다. 그것은 뭐랄까, 이기적이기에는 너무 연약한 사람들 같았다. 고작 그런 것들로 자기 위안을 삼는 사람들의 삶. 죽어라 센 척 해봤자 결국 속 알맹이는 다 똑같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이 악몽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나도 또 다르게 변주된 이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작 사람이면서, 얼마나 큰 포부를, 꿈을, 돈을, 사람들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살기는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그깟 것들이 다 중요하고 더 가지고 싶은 법이다. 피차일반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시작된다. '자기들이 나보다 잘난 줄 알고 있겠지.' 이는 경쟁의 서막을 알린다.
우리는 앞으로 달려도, 우리가 사막에 살지 않는 한 옆에는 반드시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뒤로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식우>에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처럼 반은 녹아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앞만 보고 힘을 내고 싶을 땐 뒤에 나보다 한참 뒤처진 사람을 보기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의 모습은 되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늘에서 그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 다들 반병신인 상태인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막 뛰는 것이다. 끔찍하다, 정말 악몽이다.
이를 탈출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구병모 작가는 친절하게도, 이들을 위해 비상 탈출창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게 탈출할 수 있는 건지, 더 나빠지는 건지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게 문제이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의 하이처럼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거나, 「파르마코스」의 ‘나’처럼 소녀의 얼굴을 하고서는 개구리나 벌레 따위를 뱉어내야 하거나, 「관통」의 미온처럼 미지의 세계로 흡수되거나, 「식우」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몸이 부식되거나, 「이물」의 양선처럼 낯선 침입자를 마주하거나,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 등장하는 가족들처럼 덩굴로 변하거나 해야 한다. 아니면 「이창」에 등장하는 ‘나’처럼 사람들의 질타를 두드려 맞듯이 받거나 「어디까지를 묻다」의 아가씨처럼 감정받이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개인적 원한도 없는 수많은 개인을 미워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미워하는 사람도, 미움 받는 사람도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