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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열쇠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사라의 열쇠: 타티아나 드 로즈네
영화를 인상 깊게 본 후 1년 만에 소설로 만난 책이다. (참고로 나는 나치치하 유태인 학살에 관심이 많은터다. )
그러나 영화의 감상을 뛰어 넘어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제 3자이며 주인공은 2명이다. 현재(2002년 7월)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잡지사에 일하는 미국여성 줄리아 제먼드와 1942년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인 10살짜리 꼬마 사라가 주인공이다. 소설은 1942년 7월 프랑스 생통가에서 유태인의 신분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라의 가족과 2002년 현재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줄리아의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한다. 이러한 교차전개는 나에게 지루함을 벗어 던지고 소설 속으로 집중하도록 인도해주었다.
줄리아는 [60주년 밸디브 사건: 프랑스에 독일 나치의 괴뢰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프랑스 경찰의 철저한 계획과 실행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사건을 말함.]을 취재하라는 편집장의 요구로 사건을 취재하던 중, 자신이 곧 이사하게 될 마레지구의 생통가가 과거 유태인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집이 남편의 증조부모( 현재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살고 있고 정기적으로 가족들이 방문하고 있다)가 1942년 8월부터 살던 집이라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듣는다. 기자적 직감으로 그녀는 이 집이 바로 유태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남편 가족이 새로 들어오게 된 것을 알게 된다. 때마침 줄리아는 프래모 레비교수를 인터뷰하면서 그 집에 거주하던 여자아이의 이름이 ‘사라 스타리젠스키’이며 남동생과 함께 아직도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공적인 상황과 더불어 그녀는 6년 만에 임신하는 기적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소설은 줄리아가 바로 그 유태소녀 사라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그 속에서 한 가족이 60년 동안 철저하게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은 바로 시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당시 영화를 볼 때는 이 아버지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에는 당시 사라와 또래였던 아버지가 이사와서 살던 집을 사라가 찾아오고 자신의 방 벽장에서 사라의 남동생이 죽은 채로 앉아있는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고백한다.(사라의 남동생은 사라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던 날 사라가 집 벽장에 남동생을 열쇠로 잠그고 떠났다. 사라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으며, 막상 한달 후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시체로 변한 남동생을 발견하게 된다. 사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벽장 열쇠를 소중히 간직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는 이 사건을 입에 담지 못하게 했으며 더욱이 다른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까지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신은 이런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평생 이 비밀을 간직해 온 것이 힘겨웠음을 고백한다.
나는 여기서 작가의 섬세함을 느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수용소로 가족을 잃은 ‘사라’에 대해서만 불쌍하고 측은한 감정을 가졌는데, 이 비밀을 평생 간직만 해야 했던 또 다른 편의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0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 아버지에게도 말 할 수 없고 진실을 알고 싶고 위로 받을 수도 없었던 한 꼬마아이가 그 시아버지 내면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 비밀은 프랑스의 한 가족을 넘어서 프랑스 사람들 전체에게 여전히 기억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을 작가는 건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고 내면에 꽁꽁 간직함으로서 오히려 기억과 수치로부터 해방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해 유태인에게 용서를 구하며 영원히 기억하자는 연설을 보여준다. 프랑스 국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 소설은 줄리아가 살아있을 수도 있는 사라를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나는 줄리아가 왜 그리 집착할 정도로 사라를 찾아가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사라는 어떤 의미일까?
먼저 줄리아는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프랑스로 건너와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 소설 곳곳에서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20여 년을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미국인(American)일 뿐이라고 말한다. 남편 가족들과도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여전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거리감을 느끼고 온갖 고상함과 지적인 아우라를 뽐내며 조개같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심정을 여러 번 피력한다. 그 속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큰 입을 벌리며 웃는 자신은 영원한 이방인인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사라를 찾아가, “내가 당신을 영원히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프랑스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해 주고 싶은 꼭 해야하는 사명감과 의무감마저 느껴진다. 이방인과 같은 느낌으로 프랑스에 살고 있는 그녀의 감정이 사라의 감정에 투사된 것은 아닐까?
결국 줄리아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라가 30여년 전에 사고로 죽고 그 아들만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는 줄리아가 그를 만나는 과정까지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과연 그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작가는 사라 즉 전쟁세대인 어머니를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고 그 아들과 만나게 함으로써 전후 세대가 이 비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화해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영화에서 이 장면, 이 남자가 어머니의 충격적 진실(프랑스계 유태인이며 가족이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줄리아를 떠나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남자의 이런 행동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조용하고 평온한 삶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 도 있는 진실을 마주하기란 누구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설은 마지막을 향한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줄리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이곳에서 그 아이를 낳는다. 사라의 아들, 헨리와 줄리아는 뉴욕의 한 카페에서 재회한다. 헨리는 고백한다. 자신이 10살 되던 해에 사고로(혹 자살) 이별해야 했던 어머니가 사실은 어떤 고통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를 알게 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부인과 결별하고 이곳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0세기에 일어난 끔직한 전쟁은 전쟁 당사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엄청난, 과히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적잖은 당사국들은 자신들의 과오와 끔찍한 행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이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당사국들까지도 치유와 해방을 방해하는 원인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전후 세대인 우리는 과거의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피해자는 피해의식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고통도 이해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각자가 걸어온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 치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