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릇 사명 -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최복이 지음 / 두란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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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

본죽 대표님의 간증을 동영상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대학가에서 허름한 호떡 가게를 시작으로 본죽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본죽의 대표가 되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삶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셨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출간하신 책을 통해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비지니스 선교사. 최복이

이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비지니스 선교사로 부르신다. 그곳으로 가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을 책의 행간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분을 이 지점까지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분의 삶에 말씀으로 꿈과 비전을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내게 인상적인 말씀, 두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단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 13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사도행전 13 : 47

본죽 대표라는 직함 이외에 <본사랑재단>을 통하여 국내외 이웃과 세계 빈곤지역 아동들을 후원 지원하고 계신다.  <본월드미션>을 통해서는 2700여명의 선교사님에게 숙소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본죽과 본도시락 사업 외에 국내외에서 다양하고 깊이

있게 사역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도하시고 채워주신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책을 통해 느낀 점

최복이 대표님은 자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가 축복을 준비하는 찬란한 시기였다고 고백하신다. 주님의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축복이

자신을 끌어왔으며 하나님은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했으며 선을 이룰 능력을 갖추게 하셨다고 고백하신다. 성령께서 친히 내 안에서 말씀으로 나를 이끄시고 전 생애를 변화시키셨다고 고백하신다. 이 분의 동일한 고백이 내 입술에도 있기를 기도한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비지니스 선교사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계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또는 지금 이제 막 그 사명을 품은 젊은 세대(여성)에게 추천하고 싶다. 하나님의 주신 비전과 사명이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꿈을 이루시는 분도 그 분이시기에. 그 지경이 어느 지점까지 확장될지, 청지기로서 어떤 마음과 태도로 경영에 임해야 하는지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이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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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면 살아난다 - 하나님 나라 기도운동
이인호 지음 / 두란노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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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다.

p29

무디는 1857-1858년에 일어난 기도 부흥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구두수선공이었던 그는

'하나님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한 사람을 찾으신다'라는 헨리 머레이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p91

이 책은 사랑의 교회에서 중 보기도 사역자로 부름받고 그곳에서 3000여 명의 교인을 중보기도 사역자로 훈련하신 분이 쓰신 책입니다. 이인호 목사님은 현재 '더 사랑의 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고 계십니다.

중보기도의 모델은 '성경의 주 기도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 기도문을 통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며 주 기도문의 "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게 하소서"라는 말이 곧 중보기도의 핵심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개인적 경건생활의 영역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이고 육적인 기도를 초월하여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기도할 때 진정 우리가 속한 가정. 공동체, 교회,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중보기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보기도자들은 훈련을 통해서 사역자로 세워지고 이들이야말로 교회와 나라에 귀한 보배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중 보기도 사역자 스쿨, 중보기도훈련학교 등 실제적인 부분들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관련 훈련을 교회 공동체에서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인다면 좋은 교본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보기도가 정말 무엇일까 성경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들에게 권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제가 드린 많은 예배들이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보기도를 하신 분들이 계셨다는 사실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제 저도 조금은 성장했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진정한 중보기도자로 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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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의 숲으로 - 삶의 격랑을 넘는 지혜
이규현 지음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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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속에서 인상깊은 구절

고통의 풍랑은 거칠고 혹독하다.
삶에서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견디려면 영적인 힘을 길러야 한다. p.24


모진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킨 나무들의 내공은 깊다.

내려감의 용기가
험난한 바닷가에서 자리를 지키게 한 힘이다. p.60

 

 


    
2. 이책을 추천하는 이유

이규현 목사님의 이 책은 인생의 다양한 풍파와 파도를 지나신 어른이 지금의 20~30대의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나 또한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40대로서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새롭지 않다. 이 책은 신앙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추천하기에 부담없이 충분한 책이다.
책에는 전혀 종교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3. 책속으로                     

미래의 불안감이 일상화가 된 지금,
미래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직면하고 현재에 충실할 때 드넓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안정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주변에 많은 것들을 쌓아올린다. 알랭드 보통이 그의 책 불안에서 현대인의 불안의 강도가 센 것은그만큼 내면의 욕망이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과 욕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실패는 그 유익이 있다고 전한다. 인생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실패한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그 경험과 상처와 고통이 고스란히 나만의 스토리로 빚어진다고 말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나만의 보석이 되는 것이다.

♠♤ 나는 아직 내 스토리가 하늘의 별과 같이 총총히 빛나는 경험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로할 수 는 있을 거 같다.


 
이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일상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전한다
.


본질과 비본질의 영역을 구분하는 분별력도 기르게 되고 불필요한 삶의 영역들은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고 자신만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그곳에 에너지를 발산함으로 새로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할 수 있다.   
 
♠♤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삶의 가장 바닥에서 허우적 거릴때 나의 우선순위는 순번을 매기고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나에 대히여 끊임없이 질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래서 고난과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을 이제는 좀 알거 같다.

이제 정말 잊지 말아야 할것은,

이 모든 것은 일상 속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일상을 경험하며 날마다 새로운 경이로 가득찬 일상을 만나게 된다. 자신과의 약속으로 하루 한 번의 반복이 이뤄내는 작은 승리를 통해 결국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이길수 있다.

이제 내 안의 변화를 넘어서 세상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납함으로 축복할 수 있는 그릇으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전한다.

♤♠ 모든 축복은 관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130억 인구 중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는 것이 사실 놀랍다. 때로는 그들과 갈등하고 실망하고 소원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한 큰 그릇으로 빚기 위한 신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들은 나의 모난 성품을 둥글게 만들어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닫는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모든 분야는 벽 곧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 벽에 넘어지지 말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자. 그때야 비로서 그 벽의 높이만큼 나는 자란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행복이 늘 공존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음 한다.
이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으로 삶은 살아내게 된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견딘 사람만이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되어 나름의 향기와 풍미를 지니는 거목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과거의 실패를 어떤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 지금 광야(wilderness) 와 같은 여정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기를,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내가 개척할 미래에 계속해서 질문함으로 그 미래를 바로 지금 , 현실에서 살아내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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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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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Life of Pi) : 마텔

 

나는 소설 [파이 이야기] 마지막 장을 덮은 느낀 소름과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작가는 내가 평상시 가지고 있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하도록 나를 인도하였다. 구체적이고 직설적 질문이 아닌 모든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나로 하여금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이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좋아질 같다.

 

소설의 주인공은 파이(Pi)라는 소년이다. 소설의 도입부에는 캐나다 작가가 등장한다. 그는 소설을 쓰러 인도에 왔지만 좋은 구상이 떠오르지 않던 차에 인도 남자를 만난다. 그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지인, 파이를 만나볼 것을 권한다. 그에게는 훌륭한 이야기가 있으며 당신이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신의 존재를 믿게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남긴다.

 

작가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중년의 파이를 만나러 간다. 파이는 인도의 폰디체리(과거 프랑스 식민지) 지방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15살의 소년이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 힌두교, 이슬람교, 천주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특한 소년이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가 벵골산 호랑이가 염소를 사납게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호랑이는 사나운 맹수다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경험을 통해 비록 우리에 갇혀 조용한 살고 있지만, 실제 호랑이의 모습은 사나운 맹수임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장면이 결국 인간에 대한 은유로 작가가 표현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가족은 인도의 정권이 바뀌면서 혼란스러워진 국가를 떠나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다. 모든 동물을 팔지 못하고 가격을 받을 있는 일부 동물을 태우고 화물선에 올라 캐나다로 향한다. 그러나 배는 중간에 난파당하고 파이는 4명의 동물(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호랑이) 구조선에 오르게 된다. 이제부터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유려하면서 섬세한 손길로 호랑이 ( 이름 : 리차드 파커) 파이의 7개월간의 표류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지루하지 않은 문장, 바다삶의 생생한 묘사는 동물들과의 생존 속으로 우리를 빨려 들어가게 한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차례로 먹이감으로 사냥하고 마지막으로  리차드 파커가 하이에나를 포식함으로 이제 그와 파이만이 남게 된다.

 

무모한 동시에 영리한 파이는 리차드 파커와의 공존을 꾀한다. 그에게 자신이 우월한 존재임을 인식시키는 여러 훈련 과정들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오줌을 눔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증류기를 통해 물을 먹이고 물고기를 잡아 그의 배고픔을 해결주는 과정을 통해  리차드 파커는 맹수로서의 호랑이가 아닌 그의 바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친구로서 변모한다. 소설 중간 중간에 파이는 리차드 파커에게 고마움을, 우정을 표현한다. ‘네가 없었더라면 죽음과 고통의 공간인 바다에서 없었을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읽으며 나는 불가능한 조합인 인간과 호랑이의 공존에 가슴이 따듯해 진다. 15살의 소년이 바다 가운데서 죽음과 역경을 이기고 살아남음으로써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준다고 뿌듯하게 여기면서

 

그런데 마지막, 작가는 우리에게 충격스러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자부심과 위로를 역전시킨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부분에서 밝힌 구조선에 오른 4명의 동물이 바로 사람으로 치환되는 순간에 일어난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호랑이와 파이는 프랑스 요리사, 일본 선원, 어머니, 파이인 나의 이야기로 바뀐다. 결국 일본인 선원을 죽이고 그의 인육을 미끼로 사용한 요리사, 다시 어머니를 죽이고 살아남은 요리사와 파이. 결국 리차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요리사를 죽이고 그의 인육을 먹게 파이,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호랑이는 인간과 다른 사나운 맹수이다. 라는 사실을 경험한 소년이 결국 인간인 자신의 야만성을 깨닫게 것이 아닐까?  동물원으로 상징되는 우리에 갇혀 있을 호랑이는 야수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시간이 되면 먹이가 주인에게서 제공된다. 나는 합리적 이성이야 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최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원으로 상징되는 교육, 환경, 시스템에 의해 동물과 같은 야만성을 억누르고 자제하며 사회화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우주 질서를 창조한 신의 인간을 향한 구원에 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된다. 소설은 마지막에 묻는다. 당신은 동물의 이야기가 좋습니까? 사람의 이야기가 좋습니까? 나는 동물의 이야기가 좋다고 말하고 싶어질 같다. 언제나 진실은 알기가 두려우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이야기를 직시한다면, 인간이 가진 한계, 유한성에 대한 신의 구원과 사랑을 느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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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열쇠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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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열쇠:  타티아나 드 로즈네

 

영화를 인상 깊게 본 후 1년 만에 소설로 만난 책이다. (참고로 나는 나치치하 유태인 학살에 관심이 많은터다. )

그러나 영화의 감상을 뛰어 넘어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제 3자이며 주인공은 2명이다. 현재(2002 7)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잡지사에 일하는 미국여성 줄리아 제먼드와 1942년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인 10살짜리 꼬마 사라가 주인공이다. 소설은 1942 7월 프랑스 생통가에서 유태인의 신분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라의 가족과 2002년 현재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줄리아의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한다. 이러한 교차전개는 나에게 지루함을 벗어 던지고 소설 속으로 집중하도록 인도해주었다.

 

줄리아는 [60주년 밸디브 사건: 프랑스에 독일 나치의 괴뢰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프랑스 경찰의 철저한 계획과 실행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사건을 말함.]을 취재하라는 편집장의 요구로 사건을 취재하던 중, 자신이 곧 이사하게 될 마레지구의 생통가가 과거 유태인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집이 남편의 증조부모( 현재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살고 있고 정기적으로 가족들이 방문하고 있다) 1942 8월부터 살던 집이라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듣는다. 기자적 직감으로 그녀는 이 집이 바로 유태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남편 가족이 새로 들어오게 된 것을 알게 된다. 때마침 줄리아는 프래모 레비교수를 인터뷰하면서 그 집에 거주하던 여자아이의 이름이 사라 스타리젠스키이며 남동생과 함께 아직도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공적인 상황과 더불어 그녀는 6년 만에 임신하는 기적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소설은 줄리아가 바로 그 유태소녀 사라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그 속에서 한 가족이 60년 동안 철저하게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은 바로 시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당시 영화를 볼 때는 이 아버지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에는 당시 사라와 또래였던 아버지가 이사와서 살던 집을 사라가 찾아오고 자신의 방 벽장에서 사라의 남동생이 죽은 채로 앉아있는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고백한다.(사라의 남동생은 사라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던 날 사라가 집 벽장에 남동생을 열쇠로 잠그고 떠났다. 사라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으며, 막상 한달 후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시체로 변한 남동생을 발견하게 된다. 사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벽장 열쇠를 소중히 간직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는 이 사건을 입에 담지 못하게 했으며 더욱이 다른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까지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신은 이런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평생 이 비밀을 간직해 온 것이 힘겨웠음을 고백한다.

 

나는 여기서 작가의 섬세함을 느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수용소로 가족을 잃은 사라에 대해서만 불쌍하고 측은한 감정을 가졌는데, 이 비밀을 평생 간직만 해야 했던 또 다른 편의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0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 아버지에게도 말 할 수 없고 진실을 알고 싶고 위로 받을 수도 없었던 한 꼬마아이가 그 시아버지 내면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 비밀은 프랑스의 한 가족을 넘어서 프랑스 사람들 전체에게 여전히 기억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을 작가는 건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고 내면에 꽁꽁 간직함으로서 오히려 기억과 수치로부터 해방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해 유태인에게 용서를 구하며 영원히 기억하자는 연설을 보여준다. 프랑스 국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 소설은 줄리아가 살아있을 수도 있는 사라를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나는 줄리아가 왜 그리 집착할 정도로 사라를 찾아가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사라는 어떤 의미일까?

 

먼저 줄리아는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프랑스로 건너와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 소설 곳곳에서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20여 년을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미국인(American)일 뿐이라고 말한다. 남편 가족들과도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여전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거리감을 느끼고 온갖 고상함과 지적인 아우라를 뽐내며 조개같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심정을 여러 번 피력한다. 그 속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큰 입을 벌리며 웃는 자신은 영원한 이방인인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사라를 찾아가, “내가 당신을 영원히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프랑스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해 주고 싶은 꼭 해야하는 사명감과 의무감마저 느껴진다. 이방인과 같은 느낌으로 프랑스에 살고 있는 그녀의 감정이 사라의 감정에 투사된 것은 아닐까?

 

결국 줄리아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라가 30여년 전에 사고로 죽고 그 아들만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는 줄리아가 그를 만나는 과정까지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과연 그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작가는 사라 즉 전쟁세대인 어머니를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고 그 아들과 만나게 함으로써 전후 세대가 이 비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화해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영화에서 이 장면, 이 남자가 어머니의 충격적 진실(프랑스계 유태인이며 가족이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줄리아를 떠나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남자의 이런 행동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조용하고 평온한 삶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 도 있는 진실을 마주하기란 누구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설은 마지막을 향한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줄리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이곳에서 그 아이를 낳는다. 사라의 아들, 헨리와 줄리아는 뉴욕의 한 카페에서 재회한다. 헨리는 고백한다. 자신이 10살 되던 해에 사고로(혹 자살) 이별해야 했던 어머니가 사실은 어떤 고통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를 알게 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부인과 결별하고 이곳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0세기에 일어난 끔직한 전쟁은 전쟁 당사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엄청난, 과히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적잖은 당사국들은 자신들의 과오와 끔찍한 행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이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당사국들까지도 치유와 해방을 방해하는 원인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전후 세대인 우리는 과거의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피해자는 피해의식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고통도 이해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각자가 걸어온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 치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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