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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 《죔레는 거기에》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번역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어, 《죔레는 거기에》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기대가 생겼다. 감사하게도 출판사 은행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친구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
91세의 요지 아저씨는 삶에 대한 의욕을 거의 잃은 상태로 등장한다.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나 그의 혈통에 대해 알고 있다며, 왕이 되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붙여준 호칭 ‘폐하’를 끝내 거부하고 ‘요지 아저씨’로 불러달라고 한다.
나는 소설의 초반에서 왕정 복고라는 설정 때문에 이 소설의 배경이 과거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중반에서 AI, 유튜브, 스마트폰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 순간, 이 이야기가 철저히 동시대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물들이 외치는 “Make Hungary Great Again!”이라는 구호는 낯설기보다 기시감에 가깝다. “하나의 유령 — 민족주의라는 유령이 전세계를 배회하고 있다”라는 마르크스의 문장을 빌려 이 소설을 표현해본다. 친구들과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의 현실까지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며, 완전히 독립된 다른 나라들이 유사한 균열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외부의 개입은 점차 요지 아저씨를 불쏘시개로 들쑤신다. 더 이상 불을 때지 않겠다던 그는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 변화의 과정은 최근에 친구들과 함께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오르게 한다. 개인이 사고를 멈추는 순간, 얼마나 쉽게 잘못된 흐름에 편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인상적인 지점은 번역이다. 김보국 번역가는 헝가리어 원문을 직접 옮기며, 방대한 주석을 통해 독자가 작품의 맥락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 주석들은 단순한 해설을 넘어 하나의 길잡이처럼 기능한다. 한국어로 된 세계만 읽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내가 다른 세계와 닿을 수 있도록 튼튼하고 친절한 다리를 놓아주신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
작품은 인종, 세대, 이념 등 다양한 경계를 따라 형성되는 혐오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블랙코미디처럼 읽히는 장면들 사이로, 92세 노인의 고독한 말년이 겹쳐지며 묘한 잔향을 남긴다.
🔖 이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거요, 막혀버리는 것, 말하자면 꼼짝없이 조여드는 것이오, 결국 우리는 그 끝에서 막다른 데로 몰리게 되니 빠져나갈 길은 없소
요지 아저씨의 추종자들은 과거의 헝가리의 영광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은 한 개인을 넘어 요지 아저씨를, 사회 전체를 잠식해간다. 그 과정 속에서, 요지 아저씨의 심장을 쥐고 있는 존재—늘 요지 아저씨의 곁을 지키던 강아지 ‘죔레’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는다.
*위 도서는 은행나무로부터 제공받아 독서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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