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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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언니도 알다시피 그해 저는 J대 불문과에 합격했어요. 그게 언니가 아는 제 안부의 전부지요? 그러니 저희 과 사무실로 우편을 보내신 걸 테고요. 언니가 제 전화번호를 물어봤는데 조교가 `바뀐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는 걸 들었어요. 실은 사정이 생겨 그간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아왔거든요. 휴대전화를 없앤 지도 꽤 됐고. 소포가 왔으니 찾아가란 메일을 받고 며칠을 고민하다 학교에 들렀어요. 그리고 오늘 언니가 보내준 엽서와 선물을 받았어요. 아 참 언니, 이번에 아기 엄마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 언니를 못본 새 언니가 그렇게 멋진 일을 해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어요. 만일 제가 언니의 아기라면 내 엄마가 언니란 사실이 무척 기뻤을 거예요.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

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론 언니가 이런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봤다고 할까 봐 겁이 나요. 언니는 이제 육아와 적금, 시댁과의 관계나 건강 문제에 부딪힐 테고. 이전에 절박했던 문제는 그다음 과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 나이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이 얘길 언니에게밖에 할 수 없어 편지를 써요. 다 써놓고 끝끝내 부치지 못할지라도. 오늘 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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