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문지아이들
이경혜 지음, 민혜숙,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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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들어오고 나서는 내가 읽고 있는 건지 읽히는 건지 읽히지도 않는 건지 알듯 모르는 텍스트들을 타의로, 부끄러운 자의로 읽어야 했다.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마땅히 읽어야 할 책의 난이도 (결국 이야기하는 건 한문장일테지만)는 점점 올라갔고 휴대폰과 랩탑에 하루종일 부착되어 사는 디지털 사회에 찌들수록 한 문장을 마무리하는 것도 힘겨워졌다. 그래서 독서가 내게는 마지막 희망이자 절망같은 존재였는데, 이런 와중에 읽은 그림책은 흐트러진 정신에 위로가 될 법도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슬퍼졌다. 


저자는 어린 왕자를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낀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이건 슬픔이 아닐까 싶다. 


세가지 슬픔이 있었다.


첫번째는, 때가 반지르르한 지금이 아닌 나름대로 투명했던 어릴 때의 나도 어린왕자를 잘못 만났다는 것을 깨닫자 슬퍼졌다. 인위적인 상황에서 무례한 방법으로 그를 만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학년인 친언니가 들고있는 어린왕자의 보라색 표지가 신비스럽고 궁금해서 나도 몰래 따라 읽었다. 왕자님이 나오면 당연히 공주님이 나와 저주에 걸리고 눈물이 있어야 이야기가 끝난다고만 생각할 줄 알았던 어린 머리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나오는 첫페이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고 영화관에서 본 인생 첫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어른들을 따라 울줄 아는 나이가 되고나서야 다시 어린왕자를 들었다. 4학년 즘 되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독서골든벨에 나가라고 했다. 주변 어른들은 리스트에 나와 있는 책들을 네다섯번만 읽으면 1등도 노려볼만하다고 정형화된 동기부여를 해주었고 방학 내내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억지로 읽은 것은 아닌데 적절한 책임감과 명예욕, 또 2학년 때와는 달리 보아뱀과 무슨 일로 착하게 나오는 여우와 사화산 활화산 같은 개념도 이제는 배웠을 때니, 그런 것들을 이해한다는 지적 충족감이 잘 버무려져 지금도 못하는 반복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골든벨 대회에서는 최후의 2인까지 올라갔던 것 같다. 틀린 문제가 뭐였는지 몇년 전까지 기억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 나지 않는다. 틀린 문제 다음 문제가 레미제라블의 뜻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던 것만 기억난다. 그건 알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아까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도 '아, 난 4학년 때 벌써 어린왕자는 읽을 때 마다 다르다는 말을 이해했지. 그때 느낀 독서의 신비로움은 잊을 수 없어' 뭐 이따위의 멍청한 회상을 하고 있었다. 


소행성B612라는 단어를 보고는 슬퍼졌다.

퀴즈 예상 문제만 달달 외우며 책을 읽었기에 이런 명확하고 상징적인 단어들, B612,,지구는 몇번째 별, 어린왕자와 '내'가 만난 곳은 사하라 사막, 만 야광표지판처럼 눈에 띄는 것이다. 어린왕자를 퀴즈를 위한 재료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왕자와 생텍쥐페리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무례한 독서였고 불행한 기억이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어린이들은 내가 읽은 방식만큼은 피했으면 좋겠다. 읽는 것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읽기가 반복되면 훈련이 되고 훈련이 반복되면 단단한 틀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두번째 슬픔은 역시나 비슷한 맥락인데. 어른이 되어도 바람직한 만남을 하기가 여전히 어려운 것이다. 자꾸만 상징으로만 읽힌다. '골프나 넥타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터키의 전통 옷을 입고 나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1920년에 그 학자가 양복을 입고 다시 발표하자 모두들 그의 말을 믿었다.' ... 수많은 구절이 더 있겠지만. 덜 슬퍼지기 위해서 여기까지만. 얼마 전에 골프는 치지도 않는 우리 가족에게 골프장에서 돈내기 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한달에 최소 몇번은 가야하는지, 더 자연스러운 골퍼처럼 보이기 위해서 '골프를 치다'가 아니라 '공 치다'를 쓰는 요령 이라든지 구구절절 골프만 이야기 하다간 한 어른이 생각났다. 나는 어른스러운 것들에 동조하지 않는, 생텍쥐페리가 아마 원했을 세상을 함께 찾고 있으며 만들고 싶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면서도, 세상의 위선을 단번에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슬펐다. 평가를 받아야 할 자리를 갈 때는 좋아하는 멕시칸 블라우스 대신 겨드랑이에 누런 얼룩이 있을랑 말랑한 블라우스에 위에는 멀쩡해 보이는 자켓을 꼭 걸치는 나는 할말이 없다. 어릴 땐 어린왕자의 눈에서 글이 읽혔던 것 같은데 24살이 되니 생텍쥐페리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면서 읽는다.


'사람들 틈에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라는 뱀의 말이 어릴 땐 그저 뱀이 정신 나간 나쁜 놈이라 헛소리를 하는구나! 했는데

이 말이 너무도 와닿는 지금의 나는 고밀화된 도시에서도 늘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껴왔던 터다. 


세번째는, 이 책은 슬픈 책이다.


여우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 책은 어린왕자에 관한 책이기도, 생택쥐페리에 관한 책, 별과 사막과 비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책은 사랑과 슬픔에 관한 책이다. 여우는 사랑을 말한다. 그를 사랑하고 나서 기다려졌던 수많은 소리와 이미지, 향기가 차오르는 아픔과 설렘과 함께 다시 날 찾으면서 안경 아래 눈에 촉촉해지는 페이지다.



어릴 때 읽은 책은 가물가물할 뿐더러 그때 읽은 책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어쩐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 이 책의 번역이나 구성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린 왕자는 11살에도, 24살에도, 37살에도, 45살에도 ..살,..살,..살에도(사실 그 나이가 되어 읽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아파해도 아깝지 않을 깨끗한 슬픔을 가르쳐준다는 사실이다. 


어린왕자를 읽으면 그의 눈에 비치는 나를 볼 수 있다. 


문학과 지성사의 어린왕자에 민혜숙 씨 자수를 바탕으로 그려진 어린왕자의 눈은 유달리 맑다. 

저기 봐!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밭을 봐도 아무것도 안 떠올라. 하지만 넌 금발이니까 네가 날 길들이면 금빛 밀밭만 봐도 네 생각이 나겠지. 그러면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어도 좋을 거야.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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