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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죽는다 - 티베트 승려의 삶과 죽음의 바르도 체험기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헬렌 트워르코프 지음, 까르마 빼마 돌마 옮김 / 지영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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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빛나는 통찰의 걸작입니다. 어떻게 이 훌륭한 책에 리뷰와 별점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너무 놀라서 급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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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함께하는 여름
실뱅 테송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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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쪼그라드는 시대에 호메로스에게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책의 만듦새도 완벽하고 실뱅 테송의 원글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백선희 선생님의 번역이 탁월합니다. 멋진 책을 행복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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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선집 1
모리스 블랑쇼 지음,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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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이론에서 서사를 구성하는 요소를 딱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가 '시간'을 들 것이다. 서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생겨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문학을 서사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리스 블랑쇼의 <죽음의 선고>는 문학이 어떻게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누구를 살렸는지,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래서 그 여자는 죽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지, 그래서 누구와 누구가 연인 관계였는지, 그리고 '그 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방'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서사, 그게 과연 가능할까? 블랑쇼의 이 소설은 문학이 시간보다는 공간으로 구축된다는 주장을 담은 <문학의 공간>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보란듯 구현한 작품이다. 죽음의 선고는 시간적 서사에 대한 거부다. 시간이 중단되는 시점에서 죽음이 선고되지만 백 페이지를 넘어가는 언어로 죽음의 체험이 언어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은 또한 중단된다. (원제의 L'arret에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그리하여 죽음은 독자가 일종의 '차원'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매혹적이고 불가능한 초현실로 그 자리에, 책 속에, 언제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체험'은, 감각적으로 독자의 뇌리에 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사위의 세계가 변하는 책이 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독자는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과 분명히,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귀신의 집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사람이 바라보는 아침햇살이 영영 다른 의미, 다른 색채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뉴욕에 갔을 때 창고 하나를 모두 비워 각 방에서 연기자들과 댄서들이 <맥베스>를 각색해 공연하는 <슬립 노 모어>라는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가면을 쓰고 이 드라마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관객들은 단 한 사람도 같은 체험을 하지 않는다. 연기자를 따라 뛰어다니며 각 방에 끌려들어가서 살인 장면과 정사와 음모의 모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구경'하게 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드라마는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같은 공간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오로지 그 공간에 들어가 경험하는 관객의 시점만 바뀌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은, 마치 <슬립 노 모어>의 공간으로 뛰어들어가는 느낌이었고 그건 그 어떤 소설과도 달랐다. 블랑쇼의 소설은 '말이 진실 앞에서 뒷걸음치기 시작하던 순간에 태어난다.' 말이 진실을 또렷이 포착할 수 없는 '교활한' 물건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블랑쇼의 글은 뿌옇고 흐릿하고 막막한 그대로의 진실을 구축한다. 블랑쇼가 건축적으로 구축한 언어의 인공적 공간은 무섭고 이상하고 낯설고 끝없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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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
야스미나 레자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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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절반 이상을 혐오하는 괴팍하고 괴팍한 노인이 삶의 닻을 내리지 않고 끝없이 행복을 찾아 떠도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시시각각 우리의 삶은 우리를 조여들고 그 조여듦에 평생 맞서 싸웠으나 허사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소일보다는 전쟁이 낫다고, 보편의 집단적 마비보다 광기가 낫다고, 미쳐버리도록 매혹되는 순간, 세상 누구와도 다른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자살하기 위해 달려 나가다가 교통정체에 막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어차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 순간들이야말로 이라는 투쟁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그러나 아들은 아무 대답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노인의 삶에 깊은 비탄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아들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그 무반응이다. 노인은 아들이 그와 대적하고 맞서 싸워주기를 바란다. 차라리 달려들어 피를 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들은 무심하고 한가로우며 초탈하고 이미 싸움의 의욕을 잃어버린 듯 보이기에 노인은 비탄한다.

 

아들이 행복의 투사가 되느니 차라리 범죄자가 되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노인이 끔찍하게 증오하는 행복은 따옴표가 커다랗게 쳐진 행복이다. 실존의 적으로서의 안주, 싸워보기도 전에 투항하는 안락, 안온한 일상이 흔들릴까봐 미리 웅크리는 비겁, 보편과 집단적 정체성으로 녹아드는 자아. 하지만 온전히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삶을 뒤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사적인 길로 접어드는 치명적 선택이다. 반드시 고독이, 반드시 어떻게도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이, 반드시 깊고 깊은 비탄이 따르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노인의 행복은 언제나 한 점, 시간의 한 점에서 삶을 뒤흔드는 열정의 춤사위로 정의된다. 삶이 뒤흔들리는 순간, 영원한 현재형의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코 지속되지 않는 행복. 우리는 결국 무덤으로 행진하는 존재이기에, 춤을 춥시다, 주느비에브. “끝나지 않는무덤 앞에서 멈춰 서서 다시 시작하는 아름다운 음악과, 루스파우더 한 통을 사기 위해 자살하려는 힘을 끌어 모으는 아내의 모습과, 중력에 처진 모습으로 죽어가지 않기 위해서, 전쟁처럼 결혼생활을 하고 사랑을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인간들을 차라리 사랑하는 남자. 그래서 야스미나 레자는 실존을 위협하는 행복과 필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쟁을 충돌시켜 소리 없는 굉음을 내고,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고 읽어 내려가던 독자로 하여금 등줄기에 얼음이 끼얹어진 충격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다.

 

무덤이 부르기 전에 이미 죽음을 선택한 이 세상의 행복한 사람들에게 경종을. 행복과 결코 혼동할 수 없이 삶을 뒤흔드는그 모든 순간들, “삶을 뒤흔드는비탄을 선택하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헛되고 잔인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에 축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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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레스팅 클럽
메그 월리처 지음, 김선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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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 울리처의 열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평단의 호평도 쏟아졌지만 특히 열렬한 환호를 보낸 건 동료 작가들이었다. <처녀들, 자살하다>를 쓴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 비견되는 역작이라고까지 감격했다. 오늘날의 작가들이 울리처의 <인터레스팅 클럽>에 보냈던 뜨거운 찬사는, 어쩌면 요즘 소설 장르가 몰린 절박한 궁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고 쉽게 읽히며 스펙터클하고 영화화하기 쉬운 판타지 소설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고사 상태에 처한 출판계의 사정 속에서, 울리처가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대하드라마를 써냈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의 경이로운 용기를 방증했으니까.

 

소설이 예전만큼 잘 읽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현실이 소설을 뛰어넘을 정도로 드라마틱해졌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수, 초대형 자연재해, 자살 폭탄 테러, 횡령과 정치적 매장, 수백 명이 수장당하거나 불에 타 죽는 참사들이 세계의 뉴스 채널을 일상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다채널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와 사분오열된 사회의 격렬한 갈등, 자본이 사람보다 커져 버린지 오래인 세상에서 돈 앞에 날마다 깎이는 자존감과 퍽퍽해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소설을 조금 덜 읽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너무나 쉽사리, 잊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멕 울리처의 <인터레스팅 클럽>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찾아오는 결정적인 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장의 과정에서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어느 생경한 순간은 객관적으로 특별하거나 의미를 갖는 성취나 변화가 아니다. 이 소설의 평범한 이야기꾼인 줄스 제이컵슨에게, 그 순간은 어느 여름 장학금을 지원받아 참가한 아트캠프에서 자신의 위트가 뉴욕 출신의 쿨하고 멋진 아이들에게 통한다는 걸 발견하며 느닷없이 찾아온다. 아름답고 성격 좋은 애시, 불안하고 위험한 미소년 굿먼, 전설적인 포크싱어의 아들 조나, 댄서를 꿈꾸는 조숙한 여자아이 캐시, 그리고 훗날 <심슨스>와 유사한 걸작 애니메이션을 창조하게 될 못생겼지만 속 깊은 이선. 처음 싹트는 성적 호기심과 사랑, 우정, 평생을 좌우할 이상과 좌절의 시작이, 그 순간 줄스의 삶에 새겨진다.

 

그렇다. 사랑, 청춘, 우정, 그리고 나이가 들고 죽어간다는 것. 이 소설은 그렇게 진부한 키워드로 흘러가지만, 그게 얼마나 진부하지 않은 말들인지를 각인시킨다. <인터레스팅 클럽>이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현대의 우리가 참 잊기 쉬운 사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인가 하는 실감이다. 마음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누어, 그렇게 사랑이니 우정이니 질투니 미움이니 그렇게 깔끔한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다. 이 소설은 그처럼 복잡한 마음의 진실을 용감하게 들여다본다. 줄스의 우월감과 열등의식에 배어 있는 추한 이기주의와 편협한 어리석음을, <인터레스팅 클럽>과 관련되어 떨치지 못하는 속물근성을 똑바로 움츠리지 않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인간적 약점들과 치졸한 단점들은 줄스의 이상주의와 이타적 헌신, 우정에 대한 충심과 날카로운 지성을 무화하지 못한다. 애시와 이선에 대한 줄스의 우정이 참된 우정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겠는가? 우리 모두의 마음이 그렇게 복잡한 것이다. 남편 데니스를 향한 사랑과 경멸이 혼재하는 그 감정들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듯,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잡하고, 언제나 한없이 복잡하기에 흥미진진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대우주만큼이나 복잡하다. 천체망원경만큼이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상 역시 경이로 가득 차 있다. 이언 매큐언은 진정한 상상력이란 우주선이나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뿐 아니라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의 액션은 평범한 마음이다. 평범한 마음의 실존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를, 이 책이 다 끝날 무렵에야 <인터레스팅 클럽>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데니스의 참된 가치, 즉 실존의 능력을 깨닫는 줄스처럼, 우리 역시 평범한 우리네 마음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고 또 흥미진진한지, 값진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대가 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어쩌면 시대의 흐름, 즉 미국 역사 그 자체일 것이다. 닉슨의 하야에서 시작되어 AIDS 공포와 통일교 열풍과 9.11을 지나 TED 컨퍼런스와 자산 관리의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캠프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이 허세 반 설익은 아이러니 반으로 예술 지상주의를 부르짖던 70년대는 청춘과 이상주의가 아직 서로에게 결별을 고하지 않았던 시대다. 줄스 제이컵슨의 특별한 재능을 향한 영원히 실현할 수 없었던 강렬한 욕망의 순수성은, 분명히 시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7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4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고 그 풍요로운 문화적 사회적 기표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클럽 친구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개인의 삶과 감정이 역사와 사회가 없는 진공 상태에서 빚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울리처의 시선은 흥미로운 화법을 창출한다. 시간을 앞뒤로 뛰어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회상이기도 하고 또 예언이기도 한, 기묘한 전지적 화법을 쓰는데, 회상인 동시에 미래의 예언인 그 독특한 시점은 개인의 삶에 존재하는 한 드라마틱한 순간을 운명과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하지만 결코 올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짜 넣는 것이다. 예컨대 굿먼의 도주가 향후 센트럴 파크를 두고 벌어질 강간과 살인, 유괴사건들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자리를 잡게 만드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 화법의 실험 자체가 울리처가 소설 속에서 추구하는 테마를 소설적으로 구현하는 장치가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최근 들어 우리가 읽기 힘들었던, 소설의 장르가 태생적으로 추구했던 사회 속 개인의 성장을 그리는 고전적인 빌둥스로만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레스팅 클럽>은 그 자체로, 너무나 흥미진진한 소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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