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레스팅 클럽
메그 월리처 지음, 김선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멕 울리처의 열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평단의 호평도 쏟아졌지만 특히 열렬한 환호를 보낸 건 동료 작가들이었다. <처녀들, 자살하다>를 쓴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 비견되는 역작이라고까지 감격했다. 오늘날의 작가들이 울리처의 <인터레스팅 클럽>에 보냈던 뜨거운 찬사는, 어쩌면 요즘 소설 장르가 몰린 절박한 궁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고 쉽게 읽히며 스펙터클하고 영화화하기 쉬운 판타지 소설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고사 상태에 처한 출판계의 사정 속에서, 울리처가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대하드라마를 써냈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의 경이로운 용기를 방증했으니까.
소설이 예전만큼 잘 읽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현실이 소설을 뛰어넘을 정도로 드라마틱해졌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수, 초대형 자연재해, 자살 폭탄 테러, 횡령과 정치적 매장, 수백 명이 수장당하거나 불에 타 죽는 참사들이 세계의 뉴스 채널을 일상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다채널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와 사분오열된 사회의 격렬한 갈등, 자본이 사람보다 커져 버린지 오래인 세상에서 돈 앞에 날마다 깎이는 자존감과 퍽퍽해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소설을 조금 덜 읽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흥미로운가’를, 너무나 쉽사리, 잊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멕 울리처의 <인터레스팅 클럽>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찾아오는 결정적인 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장의 과정에서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어느 ‘생경한 순간’은 객관적으로 특별하거나 의미를 갖는 성취나 변화가 아니다. 이 소설의 평범한 이야기꾼인 줄스 제이컵슨에게, 그 순간은 어느 여름 장학금을 지원받아 참가한 아트캠프에서 자신의 위트가 뉴욕 출신의 쿨하고 멋진 아이들에게 ‘통한다’는 걸 발견하며 느닷없이 찾아온다. 아름답고 성격 좋은 애시, 불안하고 위험한 미소년 굿먼, 전설적인 포크싱어의 아들 조나, 댄서를 꿈꾸는 조숙한 여자아이 캐시, 그리고 훗날 <심슨스>와 유사한 걸작 애니메이션을 창조하게 될 못생겼지만 속 깊은 이선. 처음 싹트는 성적 호기심과 사랑, 우정, 평생을 좌우할 이상과 좌절의 시작이, 그 순간 줄스의 삶에 새겨진다.
그렇다. 사랑, 청춘, 우정, 그리고 나이가 들고 죽어간다는 것. 이 소설은 그렇게 진부한 키워드로 흘러가지만, 그게 얼마나 진부하지 않은 말들인지를 각인시킨다. <인터레스팅 클럽>이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현대의 우리가 참 잊기 쉬운 사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인가 하는 실감이다. 마음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누어, 그렇게 사랑이니 우정이니 질투니 미움이니 그렇게 깔끔한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다. 이 소설은 그처럼 복잡한 마음의 진실을 용감하게 들여다본다. 줄스의 우월감과 열등의식에 배어 있는 추한 이기주의와 편협한 어리석음을, <인터레스팅 클럽>과 관련되어 떨치지 못하는 속물근성을 똑바로 움츠리지 않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인간적 약점들과 치졸한 단점들은 줄스의 이상주의와 이타적 헌신, 우정에 대한 충심과 날카로운 지성을 무화하지 못한다. 애시와 이선에 대한 줄스의 우정이 참된 우정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겠는가? 우리 모두의 마음이 그렇게 복잡한 것이다. 남편 데니스를 향한 사랑과 경멸이 혼재하는 그 감정들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듯,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잡하고, 언제나 한없이 복잡하기에 흥미진진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대우주만큼이나 복잡하다. 천체망원경만큼이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상 역시 경이로 가득 차 있다. 이언 매큐언은 진정한 상상력이란 우주선이나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뿐 아니라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의 액션은 평범한 마음이다. 그 ‘평범’한 마음의 실존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를, 이 책이 다 끝날 무렵에야 <인터레스팅 클럽>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데니스의 참된 가치, 즉 실존의 능력을 깨닫는 줄스처럼, 우리 역시 평범한 우리네 마음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고 또 흥미진진한지, 값진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대가 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어쩌면 시대의 흐름, 즉 미국 역사 그 자체일 것이다. 닉슨의 하야에서 시작되어 AIDS 공포와 통일교 열풍과 9.11을 지나 TED 컨퍼런스와 자산 관리의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캠프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이 허세 반 설익은 아이러니 반으로 예술 지상주의를 부르짖던 70년대는 청춘과 이상주의가 아직 서로에게 결별을 고하지 않았던 시대다. 줄스 제이컵슨의 ‘특별’한 재능을 향한 영원히 실현할 수 없었던 강렬한 욕망의 순수성은, 분명히 시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7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4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고 그 풍요로운 문화적 사회적 기표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클럽 친구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개인의 삶과 감정이 역사와 사회가 없는 진공 상태에서 빚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울리처의 시선은 흥미로운 화법을 창출한다. 시간을 앞뒤로 뛰어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회상이기도 하고 또 예언이기도 한, 기묘한 전지적 화법을 쓰는데, 회상인 동시에 미래의 예언인 그 독특한 시점은 개인의 삶에 존재하는 한 드라마틱한 순간을 운명과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하지만 결코 올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짜 넣는 것이다. 예컨대 굿먼의 도주가 향후 센트럴 파크를 두고 벌어질 강간과 살인, 유괴사건들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자리를 잡게 만드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 화법의 실험 자체가 울리처가 소설 속에서 추구하는 테마를 소설적으로 구현하는 장치가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최근 들어 우리가 읽기 힘들었던, 소설의 장르가 태생적으로 추구했던 사회 속 개인의 성장을 그리는 고전적인 빌둥스로만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레스팅 클럽>은 그 자체로, 너무나 흥미진진한 소설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