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선집 1
모리스 블랑쇼 지음,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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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이론에서 서사를 구성하는 요소를 딱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가 '시간'을 들 것이다. 서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생겨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문학을 서사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리스 블랑쇼의 <죽음의 선고>는 문학이 어떻게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누구를 살렸는지,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래서 그 여자는 죽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지, 그래서 누구와 누구가 연인 관계였는지, 그리고 '그 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방'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서사, 그게 과연 가능할까? 블랑쇼의 이 소설은 문학이 시간보다는 공간으로 구축된다는 주장을 담은 <문학의 공간>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보란듯 구현한 작품이다. 죽음의 선고는 시간적 서사에 대한 거부다. 시간이 중단되는 시점에서 죽음이 선고되지만 백 페이지를 넘어가는 언어로 죽음의 체험이 언어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은 또한 중단된다. (원제의 L'arret에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그리하여 죽음은 독자가 일종의 '차원'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매혹적이고 불가능한 초현실로 그 자리에, 책 속에, 언제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체험'은, 감각적으로 독자의 뇌리에 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사위의 세계가 변하는 책이 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독자는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과 분명히,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귀신의 집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사람이 바라보는 아침햇살이 영영 다른 의미, 다른 색채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뉴욕에 갔을 때 창고 하나를 모두 비워 각 방에서 연기자들과 댄서들이 <맥베스>를 각색해 공연하는 <슬립 노 모어>라는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가면을 쓰고 이 드라마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관객들은 단 한 사람도 같은 체험을 하지 않는다. 연기자를 따라 뛰어다니며 각 방에 끌려들어가서 살인 장면과 정사와 음모의 모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구경'하게 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드라마는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같은 공간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오로지 그 공간에 들어가 경험하는 관객의 시점만 바뀌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은, 마치 <슬립 노 모어>의 공간으로 뛰어들어가는 느낌이었고 그건 그 어떤 소설과도 달랐다. 블랑쇼의 소설은 '말이 진실 앞에서 뒷걸음치기 시작하던 순간에 태어난다.' 말이 진실을 또렷이 포착할 수 없는 '교활한' 물건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블랑쇼의 글은 뿌옇고 흐릿하고 막막한 그대로의 진실을 구축한다. 블랑쇼가 건축적으로 구축한 언어의 인공적 공간은 무섭고 이상하고 낯설고 끝없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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