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현재사 - 당신이 말하는 청년은 ‘우리’가 아니다
김창인.전병찬.안태언 지음, 청년담론 / 시대의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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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이제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약대를 이제 막 졸업한 친구는, 이제 마지막으로 군대를 졸업하기 위해 4월 15일에 입대를 합니다.


저도 어차피 놀겠다, 둘이 재미있는 것  없을까 생각하다 나온 것이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도 저도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 게임을 같은걸 하지도 않으니 고등학교 때처럼 주제 잡고 이야기나 해보려고 했습니다.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볼까 고민하다 걸린 것이 "청년"이라는 키워드였습니다. 그리고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하다 우연히 "청년현재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청년은 '우리'가 아니다



도대체 청년이 무엇이길레, 이렇게 책 표지에서부터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당신은 또 누구고, 우리는 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무엇일까 표지에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또 남들이 생각하기에 저는 청년이 맞았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저를 "학생"이라고 불렀고, 아이의 손을 잡은 아주머니들은 저를 보고 "삼촌, 형아"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아직 "아저씨"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청년이 분명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처럼 보통, 청년을 말한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학생. 젊음, 청춘 등이 떠오릅니다. 수치적으로는 나이로 보는 것이 맞으려나요?


그렇다면, 이 부제에서 나온 "당신"은 누구일까요?


너 청년이니까 힘들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목차를 읽기도 전에, 만난 프롤로그에서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p13, 청년 문제에 대한 청년들의 괴리감은 '힘듦의 정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힘듦'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다. 애초에 '얼마나 힘드냐'라고 질문하고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청년들 스스로 힘듦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p14, 그런데 뉴스와 정치권에서는 청년들이 왜 힘든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저 '청년들이 힘들다'는 사실만 부각시키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청년들이 힘들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려는 "뉴스와 정치권"이었습니다. 저도 뉴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아 애들은 빛이 1,000만 원씩 있다는데, 나는 없어서 다행이다. 뭐 일자리 문제야, 내가 공부한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 때문도 있지...", 티브이를 보면서 스쳤던 생각은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뿐이었습니다. 


 당신(언론과 정치권)이 말하는 청년은 내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나를 불쌍한 세대, 사람, 청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언론이 모든 사람의 말을 대변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말만을 반복할 때, 사람들의 언로(言路)와 사고는 막힙니다. 그리고 흐르지 않는 말과 생각은 썩고, 고정관념, 프레임이라는 찌꺼기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책에서 콕 집어주니, 갑자기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힘듦에 대해서 알리는 것도 언론과 정치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 하는 것은 선동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익과 유지 그리고 고정관념을 만들기 위한.


과연 청년 문제를 다루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콘텐츠들에는 어떤 맥락이 숨어 있을까요? 왜 "청년"이 '힘든 청년"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청년 : 낡은 것을 받아들여, 낡은 사람이 될 것인가?


p14, 그래서 이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몰랐던 청년'들의 이야기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청년들의 이야기다.

"청년 현재사"는 "당신들"이 애써 말하지 않아 왔던 청년들의 모습과, 청년들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제시해줍니다. 


저도 곳곳에 있는 인터뷰에 응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는 청년은 정말 적었구나" 생각이 들며, 놀라웠습니다. 


또, 멀게만 느껴졌던 일자리 문제,  주거 문제, 출산 문제를 보는 시선들과 실현 가능한 해결책들을 소개해준 부분에서는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생각이 들며, 투표를 할 때 꼭 고려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얘기들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들 아니야?"  "여러 문제들이 복합되어 있겠지, 알잖아 모두, 원데이 투데이도 아니고..." "당신, 기성세대도 청년 아니었나?,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 갔을 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책은 먼저 "청년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청년을 단순히 세대가 아닌 "미래 가치"로 세울 것을 주장합니다. 청년이라는 세대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병폐들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청년 문제를 다른 세대 문제와 구별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의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청년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세대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청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대해 비판합니다. 또, 그 의도적인 눈빛들로부터 피할 근거들을 던져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부정하고 낡은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청년"은 낡은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세상을 바꾸자"

노루의 곡식창고


1, WHO : 청년은 누구인가?, 소결 : 청년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자

p37, 결국 청년 문제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병폐들의 집합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년 세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계급 착취 문제, 학벌, 도시와 지역 간의 인프라 격차 등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종합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는 청년이 계급과 젠더를 막론한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동 문제, 청소년 문제, 노인 문제 또한 세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인 문제가 사회적 책임과 윤리, 도덕의 문제라면, 청년 문제(아동과 청소년을 포함한)는 미래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다른 세대적 문제와는 구별되는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 사회 병폐들이 하나의 사슬이라면, 청년 문제는 그중 가장 본질과 맞닿아 있는 고리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 문제를 특수하게 호명할 수 있다. 

정리하면, 청년 문제 해결은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한다.


청년은 생산력과 소비력의 가능성을 품은 세대입니다. 또한 청년 세대는 시간이 지나면 기성세대가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그때의 청년은 "청년이었던 기성세대"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이 바뀌면, 저도 반드시 기성세대가 되는 걸까요? 책에서는 "세상을 바꾸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습니다. 구조와 법을 바꾼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병폐의 근본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의 마음까지는 바꿀 수 없을 테니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돈이 많고, 환경이 좋다고 생각된다면, 당연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요. 


만약 지금, 권위나 권력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바꿔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면, 사회의 가치를 바로 세우며 청년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이면 그 언행은 다분히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병폐가 되겠지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까지 속여, 힘이나 권위를 얻고자 했을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은 하나의 존재 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 나라의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갈 것임을, 나와 남을 권력이나 재산이 아닌, 하나의 역할로 보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임을, 이 역할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그리고 때가 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기쁘게 줄 것임을, 그리고 다만 이 선언과 이 선언을 통해 살아감으로써 만족할 것임에 대한 존재 선언이 아닐까요?


*백범일지, 나의 소원, 정치 이념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 선언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다, 김구 선생님이 쓰신 나의 소원일 일부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결국 이 선언이 김구 선생님이 말하는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두가 이 선언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문화와 교육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 명 한 명 하다 보면 모두가 되지 않을까... 3.1 운동처럼.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이희승 역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맞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위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100년 전에 쓰여진 기미독립선언서의 일부분도 생각이 났습니다. 읽어보면 지금이랑 대상만 바뀌었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선언에서도 밝혔다시피,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를 겨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 세태를 만든 기성세대의 권력이라고 하더라... 화낼 때도 있어야겠죠.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것은, "구별된 세대의 선언"이 아닌, "선언으로서 하나가 된 세대"이지 않을까요?


한 번 써봐야겠어요.


2, WHAT2 : 청년 주거난의 본질, '집 마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집'을 상상한다.

p88,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상하게도 집이 '권리'보다 '재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처럼, "재산"으로서의 "권력"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조물주의 창조력과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건물주의 소비력. 현실에서는 소비력이 더 센 것 같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요즘 시대의 "신"은 죽었다니까요.


분명히 만드실 때, 땅에 주인은 없었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지도 않은 것인데, 왜 이렇게 비쌀까요. 만들었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3, WHAT3 : 청년이 가족을 거부하는 이유, 출산율 괴담의 진실

p114, 역사적으로도 출산율이 제대로 통제되거나 예측된 적은 별로 없었다. 애를 많이 낳으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했고, 저출산 시대에는 애를 많이 낳으라고 성화다. 결국 출산율로 통계 놀음을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선 별 의미가 없는 'if 놀이'에 불과하다.

돼지의 해에는 유독 다른 해보다 출산율이 높다고 합니다. 또 2002 월드컵 때에도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뭐 확실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에요. 인구수를 통제하려는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움직임이겠지만, 정책보다는 월드컵과 십이지신이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부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겠죠. 내 아이가 안전할 수 없으니.


4, HOW2: 청년의 정치, 정치에 무관심한 촛불세대?

p148, 결국 지금 청년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소극성과 왜곡된 인식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 책임은 우리 사회가 모두 분담해야 할 문제다.
...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조직과 집단성의 회복이다. 이를 위해 최근 많은 청년들이 나서고 있다.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의 역할은 이러한 청년들의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보장하고 지원해주는 것이지, 20대를 '정치 혐오'라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청년들이 만들어야 될 정치는 아마도 고여버린 물에 새물을 붇고, 물길을 만드는 것일 겁니다. 힘은 넘치지만, 삽을 쥐어 본 적이 없으니, 삽 쥐고 파는 법부터 배워야겠죠. 


가르쳐주지도 않아 놓고, 삽질 왜 못하냐고 혼만 내면, 물은 계속 고여갈 수밖에 없고, 곧 썩은 내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나중에 "기성세대가 된 지금의 청년"들의 역할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권력을 물려 받음이 아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그 권리를 얻을 것. 그리고 또 다음 일어나는 다음 청년들의 더 나은 정치에, 그 권리를 물려줄 것.


5, AND : 청년담론, 세상을 바꾸자

p193, 대한민국은 '늙은 나라'다. 건국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둔감하고 또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늙었다. 
p194, 낡은 것을 청산한다는 기치는 생각보다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바꿔낼 수 있다. 이것은 낡은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가 아니라, 청년 세대의 책무다. 세상을 바꾸자. 

생물이 항상성을 가지듯, 국가라는 하나의 관념도, 생물들의 관계로 이루어졌기에 항상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변화에 재빠르게 반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지 능력이 약해진 사람은 질병에 취약합니다. 당뇨병이 여러 합병증을 불러오듯, 이 재빠르게 변화에 반응하지 못하는 국가도 여러 병에 들 것이 뻔합니다.


 생각으로만 변하지 않는다, 변하고 싶지 않다고 우겨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항상 같은 것은,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는 없으니까요. 


저도 제 안의 낡은 저를 버려봐야겠습니다.



읽어보세요


청년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청년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 목소리를 내어주세요.



추신 : 이 책을 써주신 청년담론에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다른 책 또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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