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맞춤 요리책 - 자취생, 싱글 직장인, 기러기아빠, 주말부부까지 혼자서 잘 차려먹기
월간 수퍼레시피 지음 / 레시피팩토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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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강 편의점이나 바깥 음식점에서 밥을 먹기가 십상입니다. 이 책은 1인 가구를 대상으로 간편하지만 실속 있는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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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찌지 않는 습관 - 대한민국 건강 지킴이 이재성 박사의
이재성 지음 / 소라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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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라고 하면 무조건 적게 먹거나 열심히 운동하는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몸의 살찌는 습관들--잠, 식습관, 생활환경 등-- 하나하나를 강조하며 습관을 고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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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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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육의 문제는 상식이 되었다. 학교는 다수의 학생들에게 의미도, 전망도, 준비도 제공하지 못한다. 학교 제도에의 반항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 주관을 갖게끔 하지도 못한다. 즐거운 공간도 아니다. 엄기호는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분개와 비판에서, 이들이 갖는 학교에 대한 기대를 읽는다. 엄기호는 학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한다. 실용적인 지식 습득의 장, 비판적 계몽의 기구,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 그리고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 문제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지금의 학교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가르치는 지식은 미디어에서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낙후되었으며, 비판적인 정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사람을 국가와 시장에 종속시키기만 하며, 중산층 이상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서 작동하며, 감춰진 재능은 발견되고 계발되기보다는 무시되고 억압 받는 곳이 학교다(pp.22-25).


엄기호는 대학 강의에서 “군대를 다녀와서 성장했다”고 말하는 학생들의 일화를 언급한다(200명의 학생 중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성장했다고 말한 학생은 두 명뿐이었다). 다양성, 차이, 공존을 배울 수 있던 공간--천차만별로 이질적인 개인들이 뒤섞이는 공간이 군대이므로--이 군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군대보다도 지금의 고등학교가 더 동질적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한 반에 잘사는 학생과 못사는 학생, 성적이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이 모여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는 각각 동질적인 집단끼리 격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장이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과 함께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할 때, 다름/타자성이란 성장에 필수적이다(p.27). 타자를 만나지 않는 공간에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타자성과 단절된 채 동질성만 추구하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학생과 학생, 교사와 교수,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등 일체의 관계가 동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에 대한 관례적인 무관심을 넘어 개입하고자 할 때, 각각의 관계는 갈등과 파국을 겪는다. 관심 갖는 영역, 그리고 의견이 다른 것은 서로 간의 ‘취향’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토론하고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 건드리지 말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 된다. 교사는 우등생들이 택한 입시 전략을 존중하여 그들의 이해관계에 별반 득이 되지 않을 교육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수포자(수능포기자)’들이 수업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방관해야 한다.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는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에게까지 자신들의 교육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학부모와 교사, 학생의 관계는 정해진 형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지금의 교육 현실을 바꾸려는 의욕적인 교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역의 대학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위한 강좌를 만들기도 하고, 외부 강사를 초대해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든다. 이들은 학교의 업무--관례적이고 행정 편의적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며, 승진을 포기하더라도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참교육’을 실천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역설적으로 딜레마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의 교육론을 불편하게 여기는 동료 교사들에 의해 그들은 고립된다. 다른 한편, 학생들과의 관계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들의 ‘참교육’과 학생들의 입시가 언제나 이해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적 만남’--‘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이 점차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다는 증언이다. 교육적 만남이 회피되고, 자기 단속의 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교실 속의 두 세계」에서 엄기호는 수능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 그리고 ‘수포자’인 학생들 사이의 두 세계를 묘사한다. 고등학교에 한정할 때, 수업 붕괴는 구도심, 일반 공립고, 인문계, 남학생 학급에서 두드러진다. 수업 붕괴에 대한 교사들의 감정과 경험도 자신이 어떤 학교에서 가르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수포자들은 자신이 공부해야 할 동기과 목적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업을 거부하고 방해한다. 거칠게 묘사한다면 두 세계를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포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까닭이 있음을 엄훈(2012)을 인용하며 엄기호는 지적한다. 수능에 맞추어진 진도에 ‘수포자’들이나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는 학생들은 따라갈 수 없고,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업은 그들에게 고통이 된다. 이들 학생들을 “학교 속의 문맹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재의 학교 제도는 이들의 문맹을 학습 부진의 문제로 보고, 문제의 원인이 이들의 게으름이나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상황은 정반대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모른다고 말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 자신이 대체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사용하는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익혔으며, 그것을 당연시하여 전하는 데 익숙한 것이 교사들이다(pp.51-5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개별적이고 친밀한 상호작용”(엄훈, 2012:396)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개별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목고나 소위 명문고가 아닌,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불가능하다(그러나 학생들과 눈 맞추며 접점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교사들이 있고, 그들의 시도는 유의미하다). 한편, 이들 ‘널브러진 애들’이 아닌 ‘공부하는 애들’은 어떤가? 공부하는 애들도, 다른 의미에서, 수업 붕괴를 겪는다. 그들에게는 대학 진학이 가장 큰 목표이며 수업은 입시를 위한 도구일 뿐이므로, 그들이 수업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는 전략적으로 결정된다. 입시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수업에 집중하길 요구할 수 없다. 현재의 입시 체제에서, 학교는 오히려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의 보조역을 맡곤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분노와 학교 폭력」에서 엄기호는 수업 붕괴 못지 않게 오늘날 학교의 위기로 자리 잡고 있는 학교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현재의 학교 폭력에서 특징적인 것은 학교 자체가 ‘왕따’에서부터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성별, 나이, 경제 등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고, 학생들도 신분제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계에 따른 신분적 폭력이 존재한다. 이렇게 될 때, 강자들은 약자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적 결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신분이 다른 셈이기 때문이다. 주류인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는 학생들이고, 비주류는 대개 공부도 운동도 못하며 직책도 없는 학생들이다. 주류인 학생들은 반의 분위기를 이끌며, 교사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반면 비주류인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뭉치지 못한다. 섬바디와 노바디가 구분되는 신분주의다(p.80). 섬바디가 노바디를 괴롭히며 빈번히 언급하는 것이 ‘장난’이라는 말이다. 장난이라는 말에는 타자가 상처받을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섬바디와 노바디 사이에는 다름/타자성이 배제된 셈이다. 다름/타자성의 배제는 교사 또한 갖게 되는 문제다. 교사와 학생’이 접점을 찾을 지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개입은 강한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상담’은 더 이상 학생과 교사가 서로의 다름을 직면하고 이해하는 기회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집약적이고 집중적으로 야단맞는” 시간으로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진다(p.100). 또는, 상담은 교사가 학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학교 폭력과 그것으로 인한 학생들의 돌출 행동(자살 등)이 발생함에 따라, 교사들은 학생들의 정서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관리자가 되었다. 이전의 상담이 교육, 성장 혹은 훈육과 관계된 것이었다면, 이제 상담은 돌출 행동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학생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통치술이 되었다. 학교 폭력 그 자체도 문제지만, 학교 폭력이 문제로 떠오르며 학교는 ‘육체적 생명’을 돌보는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다. 학생들의 생명은 정치적 생명에서 육체적 생명으로 축소되며, 사회적・정치적으로 축소된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도 문제가 생겨난다. 학생의 성장을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협력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이 흐른다. 학부모가 자녀의 진로와 성적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질수록 교사는 학부모의 동반자이기보다는 관리 대상이 된다. 만약 교사와 학부모가 학생의 진로에 대해 갖는 생각이 다를 경우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문과냐 이과냐, 예체능이냐 입시냐? 교사와 학부모가 의견 차이를 갖게 될 여지는 다양하다. 그러나 문제는 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요컨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열린 관계를 야기하기보다는, 폐쇄적인 경계의 관계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학부모는 자식의 역량이 부정당하는 것, 자신의 교육 방식이 비판받는 것을 경계한다.


심지어 교무실의 교사들끼리도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들과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가지므로, 업무에 있어서 동료 교사와의 관계는 부수적이기 쉽다. 교사들은 제각각 혼자 바쁘기 쉽다. 게다가 학교는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으므로, 교사들은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진다. 학생과 상담하는 것도 업무 외의 시간으로 빼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전교조를 비롯한 기존의 조직들도 예전 같지 않아서, ‘벌떡교사’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담도 높아지고 있다.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 사이의 관계도 복잡하여, 과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이었던 반면, 이제 이 복잡한 맥락에서는 그 행위는 기간제 교사에게 일을 떠넘기는 태업이 되고 만다.


책에서 중요하게 읽은 것은 오늘날의 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총체적인 분석과 진단이다. 일종의 현실적인 제언으로서 우선 함께 자리를 마주하고 문제를 문제로서 직시하고 이야기 나눌 것이 제시되고 있으나,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제언은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진다. 첫째, 우리가 함께 자리를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둘째,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로부터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꼭 필요한 제언이지만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두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애초에 실질적인 제언 이전에 오늘날의 학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쓰여진 책이므로, 남은 것은 우리가 함께 고민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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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내공 - 개념을 잡아라
존 윌슨 지음, 윤희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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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나 지금이나 논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진로에 영향을 크게 받는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입시 시험에서 논술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창의적 논술, 실천적 논술 등 그 안에서 변별점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통합 논술도 그 일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교 수업에서도 논술의 중요성은 인문계열이나 이공계열을 구분할 것 없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기업들 또한 아이디어 창안과 마케팅 등에 있어서 글쓰기와 토론 문화를 적용하는 폭을 넓히는 추세다. 이런 사정으로 오늘도 서점가에는 무수한 논술 서적이 새로 찍어져나오고, 논술학원과 과외 첨삭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 열풍 속의 글쓰기를 실용적 글쓰기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까. 여기서 무관하게 있기란 쉽지 않은 듯 여겨진다.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도 이런 논술의 중요성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책을 집어들게 것이다. 자신의 실용적 글쓰기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종의 방법론에 대한 기대를 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그러한 기대에 즉각 부응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객관적인 사고나 명료한 사고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필자가 알기로도 이런 문제를 다룬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으며, 그 가운데는 상당히 유용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책들도 있다. 이런 책들은 선입관을 갖거나, 오류를 범하거나, 논리적 연관성이 없는 것을 끌어들이거나, 사실을 확인하지 않거나, 생각의 방향이 잘못되면, 어떤 위험이 생기는지 보여주고 설명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편견과 비합리성을 깨닫도록 도와준다.(p.9)


몇 개의 예시문을 토대로 질문이 의도하는 답변을 신속하게 이끌어내고, 그것을 서론과 본론과 결론의 삼단 형식으로 원고지 지면에 영역을 배분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로 풀어내는 논술의 순결한 방법론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머리말 첫문장에서 존 월슨이 피력하고 있는 바에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객관적인 사고와 명료한 사고를 떠나서 논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여기에는 출판사 이제이북스의 책임이 얼마간 따른다. ‘Thinking With Concepts’라는 원제가 어떻게 ‘논리내공’으로 번역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따른다. 창의성을 좀 과하게 발휘하지 않았는가 하는 비판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단에 자그맣게 병기된 '개념을 잡아라!'만으로는 충분치 않아보인다. 논술 시험을 대비해 책을 구매하는 독자에게 공연한 낚시질을 일삼게 된 꼴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책을 덮는 것은 불공정해보인다. 이 책이 개념에 관한 책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객관적인 사고나 명료한 사고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객관적인 사고, 명료한 사고는 무엇인가? 그것들과 개념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 존 월슨이 피력하는 변별점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면, 책 속에서 실용적 글쓰기를 위한 순결한 논술의 방법론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싶어하는, 그러므로 앞서의 사소한 의문들을 간과하지 않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책을 서가에 도로 꽂기 전에 좀더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고”라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주제를 가르치는 데 사용된 방법들은 이질적인 것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것들일 수밖에 없기에, 이런 책들은 그 사용이 한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이런 책들을 읽고 나서 이성과 언어의 중요성을 한층 더 분명하게 개닫게 되지만, 이런 책들은 독자에게 독자 스스로가 광범위한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일관성 있는 사고의 기술은 전해주지 못한다.


(…) 나는 이 사고의 기술이 특정한 방식으로 개념을 다루고 규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에, 이를 “개념 분석(the analysis of concept)”이라 명명하였다. 이 기술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많은 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들에 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세부적이명서 적확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p.9-10)


요컨대 존 월슨은 좀더 근본적인 입장을 취한다. 지난 세기 초엽의 영미 분석철학에서 유래한 언어게임의 관점을 갖고서, 개념의 쓰임과 맥락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로 구현되는 개념에 대해서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전제하면서 그것들을 논리에 따라서 일정한 인과관계로 엮어내는 것에 만족하는 일반적인 논술의 입장과는 다르게, 존 월슨이 주장하는 개념 분석의 입장은 그 전제된 개념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고래가 1만 5천 톤짜리 화물선을 침몰시킬 수 있는가?”와 “고래는 물고기인가?”는 다른 질문이다. 첫째 질문은 사실에 관한 질문으로써, 정보를 취합하여 이 질문에 관련된 특정한 사실을 찾아내기만 하면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둘째 질문은 첫째 질문과는 구분된다. 여기에서는 “물고기란 어떤 개념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에 관한 질문은 가치에 관한 질문과도 다르다. “공산주의는 전 세계에 퍼질 것인가?”와 “공산주의는 바람직한 체제인가?”, 그리고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의 세 가지 질문을 살펴보자. 첫째 질문은 사실에 관한 질문이다. 반면 둘째 질문은 공산주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답이 결정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셋째 질문이 개념에 관한 질문이다. 공산주의라는 개념과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양립하는 지점과 대립하는 지점을 살펴보면서 개념을 규정짓기에 따라 답이 결정되는 질문이다.

존 월슨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개념에 관한 질문을 대하는 태도를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개념들을 진지하게 재검토할 것, 각 단어의 의미를 의식하면서 사용할 것.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써 복합적인 질문에서 개념을 분리할 것, 한 개념의 일차적 사용과 확대 파생된 사용을 구별할 것, 전형적 사례를 살펴볼 것, 반대 사례를 상정해볼 것, 개념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 개념 체제 속에서 개념을 파악할 것, 결정하기 어려운 사례를 상상해볼 것, 가상의 사례를 설정해볼 것, 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둘 것, 기저에 깔린 불안감을 고려할 것, 현실적 결과를 다져볼 것, 언어 차원의 결과를 예측해볼 것의 열한 가지를 제시한다.

또한 질문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언어적인 함정으로써, 추상적 대상이 실재한다는 믿음, 사실적 의미와 가치의 혼동, 보이지 않는 함축, 항진 명제의 유혹, 의미의 지나친 확장, 요술과 실재의 혼동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존 월슨은 통념적인 관점에서의 실용적 글쓰기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제목에 혹해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는 어쩌면 ‘낚였다’라는 평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존 월슨의 태도는 소통의 문제에 대해 성실한 자세로 대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진정으로 실용적인 것일지 모른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막연한 개념을 사용하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에 반해, 그 개념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소통을 하고자 하는 태도에서는 도덕철학자다운 구도자적인 일면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의 실이 엉켜있거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듯 여겨졌을 때 종종 출발점이 되주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하여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때, 휴학하고서 혼자 시간제 근무를 전전하며 고되게 돈을 벌었을 때,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이따금 생각나서 책을 펼칠 때, 내 흐트러졌던 관점을 다시 되짚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이 책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이 많고 많은 논술 서적 중의 한 권 정도로 치부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제목에 혹해 책을 펼쳤다가 구석에 쳐박아두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머리말로 돌아와서 존 월슨의 고백으로 글을 마무리 짓기로 하자. 사유마저 물신적인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이때에, 한 번쯤 책을 펼쳐 끝까지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저학년 학생들이 이 기술들을 배운다면, 그들은 이 시기를 막연하게 지내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환경 속에서 특정 과목을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과 교사들에게는 아무런 목적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시기로 보내지 않고, 분명 보다 나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좀더 솔직히 말해, 종교, 정치, 도덕, 사회과학, 자연과학, 나아가 개인적인 인간관계 등 일반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 많은 성인들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개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데보다 개념 분석을 배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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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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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브로델의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저술계획서 겸 요약이라고 해둘 수 있는 책으로,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강의는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차례로 「물질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교환의 세계」, 그리고 「세계의 시간」이 그 제목이다.


「물질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에서 브로델은 하부구조로서의 ‘물질생활’(vie matérielle), 그리고 물질생활로부터 나타나는 ‘경제생활’(vie économique)을 구분한다. 브로델은 경제생활을 ‘시장경제’(économie de marché)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나중에 있을 ‘자본주의’(capitalisme)와는 다른 것이다.


물질생활은 인구, 식품들, 기술, 화폐와 도시 등으로 구성된다. 습관적인 것으로서 물질생활은 인간의 삶 전체에 스며든다. 여기서 점차 교환 경제가 나타나고, 시장경제가 조직된다. 생산을 조직하고 소비의 방향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수준으로 시장경제는 확장된다. 시장의 바깥에 머무는 것들은 사용가치만을 지닐 뿐이지만, 시장경제에 이른 것들은 교환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시장경제는 시장, 상점, 행상들로 구성되는 낮은 차원, 그리고 정기시와 거래소로 구성되는 높은 차원으로 이어진다.


「교환의 세계」에서 브로델은 시장이 전체적인 것이 아니며, 부분적이며 생산과 소비를 불완전하게 연결하는 장치임을 지적한다. 심층의 물질생활과 교환 경제가 차지하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시장경제를 전체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어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로부터 구분한다. 일반적인 용법의 경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의어에 가까운데, 브로델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브로델은 시장경제의 가능한 두 형태를 나눔으로써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눈다. 첫째, 일상적이고 ‘투명’한 시장 교환의 형태--“눈에는 눈, 손에는 손”이라는 독일 속담처럼--가 있다. 그러나 둘째 형태, 전통적 시장과 구분되는 반反시장’도 존재하는데, 이 시장은 투명하지 않다. 상거래 경로가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생산자와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지며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중간의 상인만이 남게 된다. 소매상(tradesman)과 구분되는 도매상(merchant)이 탄생하는데, 이 도매상은 불투명한 거래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한다. 신용을 조작하고, 양화를 악화로 바뀌주는 등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 거상은 근대화의 기능 세분화 과정을 겪지 않으며, 전문화를 거치지 않는다(브로델에 따르면, 수직적 위계에 따른 기능의 분화는 밑바닥에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나타나는 영역은 둘째 형태의 교환이다. 낮은 곳에 자리하는 교환은 투명하고 경쟁의 힘이 작용하나, 높은 곳에 위치하는 교환은 섬세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교환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순전히 경제적 질서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 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 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p.77) 하기 때문이다. 브로델은 분화된 사회가 여러 개의 ‘집합’--경제 영역, 정치 영역, 문화 영역, 사회적 위계의 영역 등--으로 나뉘며,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사회 전체를 구성한다고 본다. 다른 영역과의 호응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성장해왔다. 브로델에 따르면,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거나 아니면 국가의 힘이 허약해야,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 것이지요.”(p.89)


「세계의 시간」에서 브로델은 ‘세계 전체’--15~18세기 사이 모습을 드러낸 통일성--를 말한다.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과 세계의 모든 사회와 경제와 문명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 전체란 특권을 누리는 집단, 배제된 집단으로 나뉘는 불평등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브로델은 ‘세계경제’(économie mondiale)와 ‘경제계’(économie-monde)를 구분한다. 세계경제는 세계를 전부 합쳤을 때의 경제이며, 경제계는 그중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되었으되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경제 단위를 이루는 경제권이다. 경제계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차지하며, 언제나 하나의 핵을 지니며, 중심부(coeur)-중간부(zone intermédiaire)-주변부(zone périphérique)로 이어지는 계층적 경제권으로 구성된다. 유럽의 경제계들은 자본주의적 과정과 팽창을 거치며 점차 세계의 경제계들을 침식하고 지배하여 하나의 세계경제로 통합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드넓은 공간을 이처럼 권위주의적으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브로델은 ‘도시’와 ‘국민 국가’를 구분한다. 경제계의 핵이 도시에서 점차 국민 국가로 이전되었는데, 국민 국가에서는 ‘국민 경제’(économie nationale)—물질생활의 필요와 혁신을 반영하여 국가가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통일되고 응집된 경제 공간—이 성립한다. 영국이 암스테르담을 꺾고 쟁취한 패권은 도시에서 국민 국가로 경제계의 핵이 재편된 것을 뜻한다.


브로델은 여기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성격을 다음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며, 세계적 차원과 규모에서 존재한다. 둘째, 자본주의는 법률에 의한 것이든 관행에 의한 것이든 독점에 의존한다. 셋째,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물질생활과 시장경제의 남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는 아래의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두 겹으로 깔고 그 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 서식하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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