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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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를, 망망한 삶을 건너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죽음이 흔해져버린 세계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방기한 세계에서,
잔여물들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그럼에도.
모수를 상실한 연과 한나를 헤어진 천이 그러하다. 연과 천은 '사랑하는 모수와 한나와 함께하는 나' 역시 상실하고 말지만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기 안으로 침잠해 각자 '모수와 한나와 함께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다음 구름을 기다린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라고 중얼거리며.
연과 천은 단지 살아있음으로써 언젠가 구름 사이로 나오는 빛이자 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서 내뱉는 그들의 중얼거림이 좋아,
살아서 빛 그리고 쉼을 찾아가는 그들이 좋아
괜스레 따라 해본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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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연의 중얼거림을 따라서 천이 중얼거렸다. (…) 연의 중얼거림이 듣기에 좋았고 듣기에 좋은 것은 따라 하기에 좋을 따름이었다.
천이 제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천도 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 너머의 망망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몽상가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고 옛사랑을 추억하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천도 마찬가지였다. | 154

📰 [조용호의 문학공간|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中]
재난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들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쓴다. 이장욱은 "이 인물들이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면서 "살아있음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성을, 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침잠은 한없이 가라앉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될 '그것'을 기다리는 일이라고 썼다.
"어떤 절망 내지는 상실을 극복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 더 깊이 들어갔을 때, 우리가 기다려야 할 무엇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관이나 절망이, 그냥 거기에 머무는 상태가 아닌 거죠.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는 건 삶 자체라기보다 죽음이라고 하는, 삶의 외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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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한줄

📖 "말 없고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안됐지. 하지만 안된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안됐다는 것도 의미 없는 말이 돼버렸어요."
안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안됐다는 게 의미 없는 말이 돼버릴 수도 있나요.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죽음이 의미 없는 말이 돼버릴 수도 있나요. | 37

📖 궁금한 게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모수는 말한 적이 있고 그건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라고 연은 생각했다. 그렇게 궁금해하는 힘으로 얼마간은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연은 생각했다. 그것이 좋다고 연은 또 생각했다. | 46

📖 "창밖을 오래 보고 있으면 크레인이 보이고 폐공장이 보이지만 또 수평선도 보이잖아요. 수평선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여관에서는 그런 것이 좋아. 그런 것이 좋지. 일이 많아서 힘이 들어도 그런 것이 좋으면 되는 거예요." | 50

📖 예상을 성실하게 하면 어떤 일이든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런 건 모수가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죽음은 그렇지 않을 텐데. 예상을 아무리 해도 죽음은 그렇지 않을 텐데. | 81

📖 나무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고 태양열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사막이란 모래와 허무로 가득한 낭만적인 땅이 아니라 햇볕을 피할 곳이 없는 황무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한나가 이렇게 말했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 126

📖 죽음이 흔해져버린 세계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방기한 세계에서, 잔여물들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그이들을 상상했다. (…) 그이들은 햇빛 속에 잠겨 들듯 더 깊은 물 속으로 침잠해갈 것이다. 그곳에서도 무언가가 발견될 것이다.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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