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0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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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앉은 쪽의 뒤편 벽에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클림트의 프린트였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목이 부러지도록 격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 한없이 뜨거운 사랑의 느낌을 어쩌면 저토록 황홀한 색채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일까. 황금조차 녹아 흐르게 만들어 버리는 그 열정의 온도를.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다는 클림트는 고온에 녹아 흐물거리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보며 자란 게 틀림없다. p.18

표제작인 첫번째 단편,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작가인 남편의 사후, 발표하지 않은 남편의 일기나 편지 등이 분명 남아있을 거라며 그것을 출판하길 권하는 편집자가 유선에게 찾아온다.

그의 컴퓨터 속에서 발견한 100일동안의 낯선 사랑 기록. 그리고 유선의 이니셜이 아닌 것이 분명한 M.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p.32

★이건, 일기가 아닌 픽션이 아닐까. p.37

그러나 진실을 알고있는 이는 이미 세상에 없다.
그리고 알수 없는 가려움증.

★주사를 맞고 약을 꼬박꼬박 먹는데도 자다 일어나 점점 가려워지는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밤이 이어졌다. p.42

죽은자는 침묵하고 살아있는 자는 밤새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가려움을 가지고 생을 살아간다. 유선에게 그의 기록은 해소되지 않는 가려움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p.85

얼마전 정미경 작가의 #당신의아주먼섬 을 읽었다.
비릿한 소금 냄새 나는 바닷가에서 내내 축축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번째 만난 작가의 소설집.

이 소설집에선 조금 더 오래된 잡지책의 냄새가 난다.
표제작인 #나의피투성이연인 을 비롯해 백화점 진열대 속의 명품들을 소망하며 물질에 기대어 사는 여자의 이야기 #호텔유로1203 아픈아이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치료를 중단해버린, 그러나 살아남아 현실과 돈에 고통받는 보험사 직원의 이야기 #성스러운봄 가장 조용한 여인이 주인공이지만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이야기 #비소여인 1년 전 연인과 찍었던 사진을 뒤늦게 현상하는 남자가 그로인해 고통받는 이야기 #나릿빛사진의추억 결혼하기 전 이사간 집, 그 골목길에서 만난 이웃들, 그리고 그들에게 조금씩 빠져드는 나의 이야기 #달은스스로빛나지않는다

하나씩 정리하다보니 실려있는 단편들이 떠나간 자와 남아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 같다.
남아있는 자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남은 자가 바라보는 떠난 자의 삶.

유행이 지나고 나면 더이상 패션잡지는 잡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저 미용실 한 구석에서, 자취방 구석에서, 혹은 누군가의 오래된 책장에서 그저 가만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소설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철지난 패션잡지를 닮았다.

대체 무슨 말이냐고?
일단 읽어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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