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 비평선 시네마 4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박창학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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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나 영화를 보는 안목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영화의 맨살'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화면 속에 보이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일깨우고 있다. 영화 평론 중에는 영화 외적인 것들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영화를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 책의 저자인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러한 태도를 경계하고 있으며 영화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들만을 먼저 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러한 영화 보기의 태도는 '영화의 맨살' 중 '리얼 타임 비평을 권함'이라는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글에서 하스미는 영화 보기에 있어서 동체시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체시력이란 영화 화면 속에 보이는 것들을 눈동자를 굴려가면서 최대한 놓치지 않고 보려는 눈의 움직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동체시력의 사용이야말로 하스미의 위대한 글들의 탄생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스미는 어린 시절 영화를 보다가 안면 마비가 온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도 동체시력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영화를 보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부터 그러한 영화 보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유심히 보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영화의 최소 단위인 쇼트별로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쇼트별로 영화를 분석하는 대표적인 영화학자로 데이빗 보드웰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책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보드웰은 쇼트별로 캡쳐한 사진을 제시해가면서 영화를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보드웰의 경우 꼼꼼한 쇼트의 분석이 쇼트를 분석했다는 자체로서의 의미만을 가질 뿐 영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기계적이라고만 느껴지는 영화 형식에 대한 표면적인 논의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래서 보드웰의 글을 읽다가 보면 용두사미의 허탈한 감정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그에 비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보드웰만큼 철저하게 쇼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로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하여 영화에 대한 놀라운 통찰에 이르는 경지를 선보인다. 예컨대 이 책에 실려있는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그런 놀라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하스미밖에 없다. 나는 존 포드가 그 글을 읽었더라도 감탄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글은 보드웰처럼 쇼트를 분석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해서 절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글이야말로 하스미의 동체시력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비상한 기억력도 한 몫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하스미의 글을 읽고 열광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통찰력에 감탄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영화광적인 태도에서 느끼게 되는 일종의 동지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하스미만큼의 영화광이라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왜 그리 대단한가라고 묻는다면 한나래에서 예전에 출간된 '나루세 미키오'에 실린 하스미의 글을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영화의 맨살'에 실려있는 '장 르누아르 또는 촉각도시의 흔적'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남과 여만 있으면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성립한다는 하스미의 말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지를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 르누아르 또는 촉각도시의 흔적'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익사로부터 구조된 부뒤>를 보고 '그 장면'을 확인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영화의 맨살'에는 고전영화에 관한 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깊이가 있는 글도 있고 에드워드 양, 구로사와 기요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이클 만, 웨스 앤더슨, 테렌스 맬릭, 페드로 코스타 등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감독들의 글을 포함해서 동시대의 영화들에 대한 글도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영화 관련 도서 중에 잘 팔리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영화의 맨살'은 600페이지가 넘는다. 책의 분량을 생각할 때 얼마 전에 출간된 '씨네샹떼'가 떠오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화의 맨살'은 '씨네샹떼'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신주라는 인기 필자를 동원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듣자는 것이 기획의 취지일텐데 강신주씨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너무 진부한데다가 함께 나온 이상용씨도 영화 평론가로서의 전문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재미없는 영화개론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자, 이제 남은 건 '영화의 맨살'과 함께 영화에 대해 새롭게 눈 뜨는 일뿐이다. 하스미처럼 우리도 동체시력을 사용해서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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