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의 시대 - 한국 영화문화에서 비디오필리아와 시네필리아 영화진흥위원회 50주년 기념 총서 4
이선주 지음 / 두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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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국내에 ‘시네필’ 문화를 태동케 한 1990년대 시네필을 조명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내 영화 시장의 특수한 환경 탓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필름이 아닌 비디오 관람을 통해 한국에 시네필리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시네필을 얘기하고자 할 때 ‘비디오필리아’를 먼저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비디오를 한 번이라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본 사람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과거에 비디오를 빌려봤던 공동의 기억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마을’, ‘으뜸과 버금’과 같은 비디오 체인점이 엄선된 명작들의 공급에 힘쓰기도 했으며 국내 시네필 문화 형성에 기여한 ‘영화공간 1895’, ‘씨앙씨에’ , ‘문화학교 서울’ 등의 단체들도 극장 개봉을 통해 국내에 정식으로 공개되지 못한 세계영화사에 남는 명작들을 불법 비디오를 통해 회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영화들을 알리도록 노력했다. 봉준호가 속해있던 ‘노란문’도 그 연장선상에서 많은 영화들을 비디오로 보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영화언어』, 『키노』, 『필름 컬처』는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태동시킨 『카이에 뒤 시네마』처럼 국내 영화팬들이 영화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하도록 이끌었으며 풍성한 영화 담론 형성에 기여했는가 하면, 『영화언어』 관계자들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출범시키기까지 했다. 지금은 사라진 대표적인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숭씨네마텍은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시작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아>,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등 수많은 예술영화들을 국내에 소개하며 예술영화 관객층을 넓혔다. 2000년대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면서 서울 시네마테크와 문화학교 서울이 번갈아 가면서 세계영화사를 조망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획전들을 개최했고 고전예술영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반가웠던 것은 국내 시네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필름 컬처』나 서울 시네마테크와 필름포럼, 한나래 시네마 시리즈, 이모션 북스 등의 활동들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연구서라는 목적 달성에 치중하기보다 시네필로서 저자 본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영화 사랑 고백서’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이 책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어 동시대 시네필들에게 주목받고 있는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와 함께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두 권의 책을 같이 읽으면 영화 사랑과 공동의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유사성을 발견하고 상호 보완되면서 과거에서 현재까지 시네필의 역사를 보다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언급된 단체와도 관련이 있고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들도 많아서 개인적인 감회가 남달랐다. 나의 일상이 역사화되고 내 삶이 시네필의 역사를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면서 느낀 감동이 가장 컸다. 이 시대를 통과해온 영화팬들이라면 아마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의 한복판에 있으며 당신이 영화를 보는 일상적인 행위는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 그러니 영화를 보는 것을 마음껏 즐겨라. 그 시간들은 이 책이 입증하는 것처럼 또다시 역사화가 될 테니까 말이다. 당신이 봉준호와 같이 그냥 영화가 좋아서 투자한 시간들이 모여서 한국영화사를 바꾸는 결과로 이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바로 역사의 주역이다. 『시네필의 시대』는 영화팬들에게 그러한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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