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높여주는‘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교류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주종 관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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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역사학적 필연성."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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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한국사 - 5천 년 역사가 단숨에 이해되는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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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발표된 호헌조치는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어요. 그 과정에서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밍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30대 직장인들까지 시위에 참여했어요. 국기하강식이 있는 오후6시가 되면 거리의 버스와 택시들도 시위에 함께한다는 의미로 경적을 울렸습니다. … 지금은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들과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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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는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거기에서 비롯된 황당한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일본인들은 가야에서철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가야의 풍부한 철, 덩이쇠를 가져가기 위해 왔던 겁니다. 가야는 당시 화폐처럼 이용됐던 덩이쇠를 낙랑과 왜에 수출했어요.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가야에 온 주목적은 기술 공부와 무역이었던 거지요.
일본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으려 애썼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결국 2010년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잘못된주장이 또다시 제기되지 않으려면 가야 역사에 대한 대중과 학계의 관심이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철의 나라 가야의 빛나는 역사를 기억해야 하겠지요.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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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불루 화이불치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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