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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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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버트런드 러셀은 논리와 이성의 상징에 다를 바 없었다. 십대에는 자살까지 생각하였지만 수학이 재미있어서 끝내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수학 덕후였으며 동시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와 완벽하고 모순 없는 수학의 공리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였던 학자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데다가 합리적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하여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러셀이 사랑과 결혼, 도덕에 대하여 논하다니- 다소 낯선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결혼과 도덕(Marriage & Morals)(사회평론, 2016) 사랑의 감정이 사회 근간을 지탱하는 요소라는 점을 전제로, 전통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 상호 자유로운 감정의 교류에 따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에 대한 과도한 억압은 인간 정신을 왜곡시키므로 탈피해야 할 대상이다. 부계사회가 도래하면서 남성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낳은 자식이 자신과 혈연관계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화가 지속되면서 때로 여성은 남성의 재산과 같이 취급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종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과 욕망을 불경한 것으로 치부하고 드러낼 수 없도록 금욕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겉다르고 속다른 위선적인 삶의 태도가 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성을 즐기고 규제하는 것이 삶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회적 안전망의 확보와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라 완전한 부계사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여성에게만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고 남자들의 매춘은 용인하고 있는 이중 잣대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법제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은 혼인생활에 있어서 동등한 지위에 있으며 성매매는 처벌받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 출산과 육아에 있어서 여성에게 더 많은 책임이 지워져 있으며 남성이 성매수를 하다가 적발되는 것은 운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을 한다. 겉으로는 배우자 사이의 책임과 사랑, 금욕을 말하면서 뒤로는 못할 짓을 하는 것 마냥 욕망을 분출한다. 조금 더 솔직해지고 자유롭게 사랑하되 그 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러셀의 생각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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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암브로시오 성당의 수녀들 - 1858년 하느님의 성전에서 벌어진 최초의 종교 스캔들
후베르트 볼프 지음, 김신종 옮김 / 시그마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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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 암브로시오 성당에서 예비수녀로 생활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카타리나는 호엔로에 대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성당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부터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성 암브로시오 성당의 비밀과 카타리나의 살해 음모를 밝히기 위해 종교재판이 열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진술이 취합되면서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즉 예비수녀원장이자 수도원 수녀원장대리인 마리아 루이사가 예비수녀들을 대상으로 동성애적인 행위를 강요하였고, 고해신부가 고해자인 수녀들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명목으로 딥키스나 애무를 하였으며, 지체 높은 남성들이 수녀들의 방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관례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녀들은 은밀하게 살해되곤 하였다.

 

성 암브로시오 성당의 수녀들(후베르트 볼프, 시그마북스, 2016)은 약 150년간 극비리에 숨겨져 왔다가 1998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신앙교리성의 기록보관실을 개방함에 따라 공개된 성 암브로시오 성당 사건에 관한 재판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논픽션이다. 성당 내에서의 성적 학대와 살인과 같은 범죄가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통제되지 아니하고 억압된 욕망은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어 결핍을 해소하려 들기 마련이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본래 욕구는 그 본질을 숨기고 다른 외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이런 때에 변태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가령 예비수녀에게 동성애적 행위를 요구하면서 이를 성적 정화와 돌봄의 의례인 것 마냥 속이거나 고해신부가 고해자인 수녀에게 진한 키스를 하면서 이를 사도들이 젊은이들에게 성령을 불어넣기 위해 행했던 안수와 같은 특별한 축복이라고 설명하는 행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순결을 교리적으로 강요받으면서 해소될 수 없었지만 영원히 육체에 갇힐 수만은 없었던 욕망이 종교적 의식을 가장하여 그 본래 모습을 감춘 채 드러났던 것이다. 대수녀원장의 체액을 만진 손으로 이마와 입술에 3개의 십자가를 표시해야 했다는 마리아 루시아 수녀의 진술은 바로 그런 왜곡된 욕망을 상징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과거에 보았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마무라 쇼헤이, 2001)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성욕이 생기면 몸에 물이 차오르고 성관계를 가지면 두 다리 사이에서 따뜻한 물을 뿜어내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여자가 내보내는 따뜻한 물은 무능한 중년 남성인 파트너에게 삶의 생기를 찾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강으로 흘러들어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황금어장을 형성해 어촌 사람들을 먹여살리기도 한다. 다소 엉뚱한 소재이지만 결국 욕망에 충실한 삶에 대한 찬가이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자제하고 통제해야 할 상황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삶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구와 욕망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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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터스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존 칼린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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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스포츠와의 관계는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둘 다 공정한 룰을 지키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현실에서 스포츠는 정권의 불합리성을 은폐하거나 정치적 세력 확장 등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우민화정책인 이른바 ‘3S(Sports, Screen, Sex)정책’을 펼쳤고,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우수성과 나치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하였다.(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순수하고 공정한 영역인 스포츠에 정치가 개입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보여준 뜨거운 열정과 스포츠 정신이 민족이나 국가 경제 발전 따위의 정치적 고려사항, 또는 권력에 의한 오염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스포츠가 정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이용된 또 한 건의 사례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이 된 직후 남아공 럭비 국가대표팀 스프링복스의 주장인 프랑수아 피나르를 만나 대담하게도 1995년 럭비 월드컵 우승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승한다. 이 드라마와 같은 실화가 여타 ‘스포츠의 정치화’와 다른 점은 이 게임의 목표가 정치세력의 확대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델라는 럭비 경기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에 의해 깊어진 남아공 백인과 흑인의 감정의 골을 메우고 남아공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화합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대의를 품고 있었다. 대립과 배척에서 용서와 화합으로. 이러한 구호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정략적 선전으로만 이용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났던 것이었다. 그래서 흑인에 대한 아프리카너의 지배의 상징이었던 럭비 경기장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의 노래, ‘응코시 시키렐레’가 울려퍼지는 장면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이 책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존 칼린 지음, 나선숙 옮김, 노블마인, 2010)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만델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인들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서술한다. 영화에서는 생략되거나 은유적으로 드러났던 많은 사실관계와 만델라의 삶, 철학 등이 생생하게  드러난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가 3인칭 시점을 유지하면서도 마치 당시에 관계자들과 함께 이 대사건을 경험했던 사람처럼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남아공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저자의 경력과 구체적이고 충실한 인터뷰에 덕택일 것이다. 또한 드라마와 같은 서술과 사건배치 방식은 읽는 맛을 더한다. 럭비라는 스포츠 자체의 긴장감보다 왜 1995년 럭비가 남아공에서 의미있는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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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 본죽 대표 김철호의 기본이 만들어낸 성공 레시피
김철호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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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반갑다. 물질적 조건의 만족과 규모의 성장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고 떠받드는 한국 경영 풍토, 사회적 분위기에서 본죽 대표 김철호씨처럼 인생의 행복과 원칙을 논하는 경영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많은 기업이 그들만의 비전과 핵심가치를 내세우지만 살펴볼 때마다 다소 형식적이고 허울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예컨대, 지속가능경영이나 윤리경영, 사회책임경영 등의 개념은 10여 년 전만해도 우리 기업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로하스(LOHAS,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와 같은 트렌드가 확산되고 소비자들이 점차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나 환경 등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자, 기업이미지 제고를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비전에 지속가능경영이란 몇 글자를 박아 넣고 있다. 기업의 본질과 무관한 이런 보여주기식 전략은 기업정신과 철학의 부재를 반증함과 동시에 수익성 증대라는 즉물적인 목적에만 몰두하는 기업의 천박성을 드러낸다.

본죽의 정신은 '행복'이라는 일반적인 가치로부터 출발한다. 즉, 자신의 가족과 본죽 직원의 행복이 본죽의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김철호 대표는 그 행복을 나누는 데에서 더 큰 의미를 찾으려 한다.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정도(正道) 경영이란 그 기업이 하는 일,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을 통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게 되고 결국 우리 사회는 선한 영향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p.230)
음식은 ‘상품’이기 이전에 ‘정성’이고 ‘넉넉하고 푸근한 것, 절대 먹고 나서 서운한 감이 없는 것’(p.116)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음식에 있어서는 그 완성도와 맛 등의 가치가 최우선이며 그것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은 그 다음에 놓여져야 한다. 이런 기본 가치가 전도됨으로써 유발되는 불신은 다른 어떤 것보다 차갑고 크기 때문이다. 맛과 정성으로 고객의 신뢰를 얻고 그 영향력을 사회로 확대해 나가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바로 죽이 있다. 여기에는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세심하게 조리해야 하는 죽 요리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혹자는 본죽의 이념이 다소 이상적이며 작위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의 일에 대한 생각에서는 칼뱅의 직업소명론이 언뜻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념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은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합리적이다. 아이템 선정이나 타겟층 선정에서부터 인테리어, 메뉴, 점포 운영 방식까지 그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자세로 여러 조건들을 꼼꼼하게 따진 뒤 결정한다. 김철호 대표의 여러 이력 중 하나가 ‘음식점 전문 창업 컨설턴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영을 함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시장 지향적인 선택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행복과 그로 인한 선한 영향력의 확대라는 이념에서 비롯한 본죽의 여러 경영 원칙은 이와 같은 합리적인 경영 방식과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예를 들어, 본죽은 전국 어느 가맹점에서도 미리 죽을 만들어 놓고 팔지 않는다. 손님이 주문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조리를 시작한다. 그것이 최상의 맛을 보장하고 다양한 고객의 기호를 충족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공장에서 반제품을 만들어 매장에 공급하는 편이 더 신속하게 죽을 제공하여 제한된 시간 내에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일 터이지만, 그것은 본죽의 정신, 본질과 모순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본죽 브랜드 가치의 핵심인 ‘정성’을 받아들인 고객들은 기꺼이 조리시간 15분을 기다려 주었고 이는 큰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졌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유서 깊은 빗자루 가게를 볼 수 있었는데 무려 20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6대째 빗자루를 팔아왔다고 한다. 최고급 종려나무로 만든 빗자루는 평균 30만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지만 대를 이어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고 한다. 눈앞의 물질적 보상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같은 자리에서 빗자루를 만들고 팔지 않을 것이다. 돈 뿐만 아니라 빗자루 제작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이나 보람, 자부심과 같은 가치 또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경제적 이득 이외에 지켜야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부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본죽의 성공스토리로부터 이 땅에서도 정신적 가치와 현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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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천경환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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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촌동생에게 파워포인트 제작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내 힘으로 어찌어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취업을 위해 중요하게 쓰일 문서였기 때문에 얍삽하게도 전문가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번개같이 만들어질 줄 알았던 ppt파일은 제출 전날 밤까지도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집근처 사촌동생의 집을 새벽에 급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가보았더니 그제까지도 우리 동생은 레이아웃과 그에 어울리는 컬러를 고르느라고 글자를 줄이고 늘리며 여기 저기에 배열하고 이런 색, 저런 색들을 배치해보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차라리 행정병 출신인 누군가에게 맡겨놓았다면 레이아웃 선택, 타이핑, 마무리의 과정을 30분에 걸쳐 해낸 뒤, 귀찮은 일 또 시키지 말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결과물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다가오는 마감시간에 답답함을 느끼는 한편, 디자인이라는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적(美的) 강박증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건축가이기는 하지만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사촌동생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손 안에 들어오는 모서리를 벤듯이 깎아놓은 캐논 익서스 디자인의 배려에 감동하고 가방 안에서 손을 휘저으며 찾다가 움켜쥘 때 좋은 느낌을 주는 갯츠비 헤어 왁스 용기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 뿐만 아니라, 스위스 지폐 한장에 숨겨진 입체감과 대칭성, 그리고 그 참신성을 (아닌 척 하지만) 침이 튀도록 칭찬한다. 맨홀 뚜껑 주변의 보도블럭이 단정하게 원을 그리며 잘려있지 않은 것을 지적할 때에는 그 관찰력을 떠나서 ‘뭐 저런 것까지 신경쓰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듯,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아서 저자가 꽤나 좀스러운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도 사실이나, 어떤 대상을 디자인 하든 사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디자인에 분명히 투영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더 나아가, 책을 읽거나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닌 스스로 관찰하고 느낌으로써 발견한 것들로 이루어진 지혜는 그 스케일에 상관없이 공유되고 아우를 수 있다. 자신의 연하장 제작기부터 포트폴리오까지 이것 저것 포스팅 해놓은 블로그처럼 어수선한 구성이 거슬리지만, 블로그 포스트 나열 수준의 글을 왜 책으로 엮었느냐며 불평할 수 없는 까닭은 글을 읽어나가면서 어렴풋이 저자의 이러한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챕터를 mm에서 Km까지의 단위별로 나눈 이유가 바로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그는 도시고속화도로와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드나들 때에도 추상적 풍경과 구체적 일상이 교차하는 순간의 감흥에 집중한다. 또한 가산디지털단지 일대 거리환경 정비라는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와중에 거리를 밟고 다니며 작지만 그곳의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는 요소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은 책을 읽고 난 후에 세상을 새로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의 눈으로 주변의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고 성찰하게 된다. 너무나도 심플하고 제 기능을 충실히 해서 눈치 채지 못했던 내 책상 위 스탠드의 아름다움부터 알게 모르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을 규정해왔던 시외버스 밖의 풍경까지 이 세상은 재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를 통해 작지만 큰 발견을 한다면 이는 큰 기쁨이며, 결국 삶은 소소한 발견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작은 지혜의 조각 하나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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