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천경환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촌동생에게 파워포인트 제작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내 힘으로 어찌어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취업을 위해 중요하게 쓰일 문서였기 때문에 얍삽하게도 전문가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번개같이 만들어질 줄 알았던 ppt파일은 제출 전날 밤까지도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집근처 사촌동생의 집을 새벽에 급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가보았더니 그제까지도 우리 동생은 레이아웃과 그에 어울리는 컬러를 고르느라고 글자를 줄이고 늘리며 여기 저기에 배열하고 이런 색, 저런 색들을 배치해보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차라리 행정병 출신인 누군가에게 맡겨놓았다면 레이아웃 선택, 타이핑, 마무리의 과정을 30분에 걸쳐 해낸 뒤, 귀찮은 일 또 시키지 말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결과물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다가오는 마감시간에 답답함을 느끼는 한편, 디자인이라는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적(美的) 강박증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건축가이기는 하지만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사촌동생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손 안에 들어오는 모서리를 벤듯이 깎아놓은 캐논 익서스 디자인의 배려에 감동하고 가방 안에서 손을 휘저으며 찾다가 움켜쥘 때 좋은 느낌을 주는 갯츠비 헤어 왁스 용기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 뿐만 아니라, 스위스 지폐 한장에 숨겨진 입체감과 대칭성, 그리고 그 참신성을 (아닌 척 하지만) 침이 튀도록 칭찬한다. 맨홀 뚜껑 주변의 보도블럭이 단정하게 원을 그리며 잘려있지 않은 것을 지적할 때에는 그 관찰력을 떠나서 ‘뭐 저런 것까지 신경쓰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듯,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아서 저자가 꽤나 좀스러운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도 사실이나, 어떤 대상을 디자인 하든 사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디자인에 분명히 투영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더 나아가, 책을 읽거나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닌 스스로 관찰하고 느낌으로써 발견한 것들로 이루어진 지혜는 그 스케일에 상관없이 공유되고 아우를 수 있다. 자신의 연하장 제작기부터 포트폴리오까지 이것 저것 포스팅 해놓은 블로그처럼 어수선한 구성이 거슬리지만, 블로그 포스트 나열 수준의 글을 왜 책으로 엮었느냐며 불평할 수 없는 까닭은 글을 읽어나가면서 어렴풋이 저자의 이러한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챕터를 mm에서 Km까지의 단위별로 나눈 이유가 바로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그는 도시고속화도로와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드나들 때에도 추상적 풍경과 구체적 일상이 교차하는 순간의 감흥에 집중한다. 또한 가산디지털단지 일대 거리환경 정비라는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와중에 거리를 밟고 다니며 작지만 그곳의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는 요소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은 책을 읽고 난 후에 세상을 새로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의 눈으로 주변의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고 성찰하게 된다. 너무나도 심플하고 제 기능을 충실히 해서 눈치 채지 못했던 내 책상 위 스탠드의 아름다움부터 알게 모르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을 규정해왔던 시외버스 밖의 풍경까지 이 세상은 재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를 통해 작지만 큰 발견을 한다면 이는 큰 기쁨이며, 결국 삶은 소소한 발견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작은 지혜의 조각 하나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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