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기도
산티아고 감보아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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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하고 허탈하여라

한 청년과 그의 누나를 통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강압적인 시대 분위기와 그 속에서 그들이 했던 선택을 읽으면서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야기는 마누엘이라는 콜롬비아 청년이 마약을 소지했다는 죄로 방콕 감옥에 수감되면서 시작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은 직접 그를 만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면서 그들의 삶에 깊이 관련된다.

마누엘은 출세주의에 사로잡혀 상위계급의 결정에 무조건 찬성하는 중산층에서 자랐다. 하지만 말이 중산층이었지 그들의 경제상황은 입에 겨우 풀칠할 수준이었고,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은 그들의 의무가 아니란 듯이 그를 냉대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의 누나인 후아나에게는 완전한 사랑을 주었고, 그녀는 그 시절을 맘껏 즐기며 그의 동생이 집에서 고립되도록 조종했다. 나는 이것에 관한 그녀의 독백도 읽었지만 이후에 있을 그녀의 잘못된 선택들이 그녀가 남을 조종하고 거기서 쾌락을 얻는 그녀의 선천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누엘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마누엘과 후아나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될 만큼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마누엘과 후아나가 교환했던 그 찰나의 눈빛에서 그들은 서로가 같음을 깨달았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만한 사랑이 그들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정과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결정했던 각자의 선택들이 서로 물고 물어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마누엘과 후아나가 성장하면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을 둘러싼 온갖 폭력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국가가 시민의 안녕을 보장하기는커녕, 최고 권력자의 권력유지를 위해 운영됐으며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쌓여갔다. 집안의 숨막히는 분위기 또한 그들을 진저리치게 했다. 독재정권 하의 살인, 사건 조작, 폭력, 마약유통 등 온갖 다양한 재난에서, 편안하게 쉴 수조차 없었던 집에서 그들은 숨죽여 지낼 수 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에서 탈출하여 그들만의 화산섬에서 별들을 구경하는 꿈을 꿨고, 그때까지는 서로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마누엘은 철학을 공부했고 후아나는 사회학을 공부하며 각자의 세계를 구축한다. 병원에서 있었던 눈빛교환으로 그들에게는 서로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게 됐지만 그들의 삶은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 마누엘의 삶은 외로웠다. 그에게 누나는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였지만 그 외에 그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마누엘의 삶이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위한, 끝없는 사막 달리기라고 느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자신의 본질로부터 그를 구원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그래피티도, 책도, 철학도 그를 진정으로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의 누나를 제외하고는 부모님을 포함해서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그의 상황은 너무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는 말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에 익숙했고, 이방인이 되는 것에 익숙했고, 혼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혼자가 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외로움을 곱씹고 참다가 삶과, 신과, 운명과 타협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

후아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누엘은 혼자 살아갈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후아나의 삶을 굳이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누엘과 후아나는 남매로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들 내부에 있던 진정한 힘의 본질은 서로 달랐다. 내가 느꼈을 때 후아나는 비겁했고, 마누엘은 강인했다. 그리고 그 모든 다름의 결정적인 시작은 부모님의 차별적인 사랑이었다. 후아나는 부모님에게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었고, 마누엘은 그러질 못했다. 이로써 그들 내부에 있었던 결핍의 씨앗은 마누엘의 것이 더 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오히려 가꾸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고, 후아나는 무참히 묻어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두에서 말했듯,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마누엘은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절친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다시 스스로를 그 속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내가 평생 알고 싶지 않은 잔혹한 자기형벌이다. 그는 친구에게 실망했고, 그나마 그의 일부분을 보일 수 있었던 친구를 끊어냈던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후아나는 어떠한가. 에슈노즈라는 노인의 비관주의적인 계몽사상을 이어받아 스스로를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붙였다. 그녀가 마누엘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방어기제에서 그랬다는 것도, 마누엘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삶을 지원하고자 그랬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정부의 주요인사들과 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마누엘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그와 그녀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은 뭔가 씁쓸한 자기변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과연 그녀의 최선의 선택이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을 그녀가 살았더라도 마누엘과 함께 탈출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똑똑했고 강인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이유인 동생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실현시킬 수도 있었다. 그녀의 지성과 매력을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마누엘과 함께하기 위한 돈 때문이었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돈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들이 꿈꾸던 그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면 그들의 삶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마누엘은 분명 그 용기가 있었다. 그는 외로워도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외로움을 그렇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후아나는 위험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이 진정 어디를 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권력으로부터 도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해 큰 대가를 얻는 순간, 삶은 그것들을 토해내라고 뒤통수를 쳐버린다. 후아나의 경우가 딱 그랬다. 그들이 제공하는 마약을 아무런 분별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에 자신을 파묻어버렸다. 그 결과는 너무나 큰 희생으로 돌아왔다.

마누엘의 죽음의 원인에 관해서는 다소 모호하게 입으로 전해지지만, 나는 그것이 후아나와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고, 후아나의 선택들이 마누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처음에 자신의 몸으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그 대가를 받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부터,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로부터 탈출했음에도 마누엘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때까지, 그녀는 마누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많은 순간을 지나쳐왔다. 결국 그의 주검 앞에서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진정으로 바랬던 것으로 가는 그 수많은 지름길들이 사실은 조금씩 깊어지는 낭떠러지였음을 그녀는 사랑하는 이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게 됐다. 그것들을 조금만 돌아보는 용기만 있었어도……

두 주인공인 마누엘과 후아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삶을 판단했다. 그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을지 생각했고 비극적이지 않은 다른 수많은 가능성에 빗대서 그들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이것이 어쩌면 시대의 희생양들을 굳이 비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아를 누르고, 내 과거와 현재를 제거하고 그들의 삶을 그들이 표현한대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그저 안타까운 삶의 희생양일수도 있기에……

결말의 마지막 부분은 너무 애매모호해서 뭔가 말하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열린 결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런 모호한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마지막 파편들을 굳이 맞추고 싶지는 않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보다는 그렇게 마무리된 비극의 여운을 느끼고 싶다.

격정의 시대를 지나는 국가는 언제나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고 개개인은 생존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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