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수술용 조명이 감은 눈꺼풀을 하얗게 만들었다. 실핏줄이 내비게이션처럼 잠깐 켜졌다. 그 와중에 연선을 생각했다. 언젠가의 저녁, 연선은 수용소 앞마당의 벤치에서 고작 맥주 두 캔에 취해 느슨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경모의 담배를 뺏어 들고는, 피우지는 않고 머리 위로 들고 공중에 연기로 그림을 그렸다. 혹은 글씨를 썼는지도 모른다.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바라보는 내내 승균은 담뱃재가 연선에게 떨어질까 불안했고 그 노심초사가 무색하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연선을 만나러 갈 것이다. 찾아가면 그 알 수 없는 얼굴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겠지. 수술대는 추웠고, 의사는 어쩌면 의사가 아니라 정부가 보낸 사람이라 수술을 하는 척 승균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승균은 미소 지었다. 마취약이 들어올 때, 의사가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는데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낯가림이 그나마 덜한 정윤이 다른 팀원들에게 등이 떠밀려 물었다. 승훈은 대답도 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압권이었다. 그냥 있을 땐 아무리 봐도 미남은 아닌 승훈이었지만, 웃으면 미남이 되었다. 종종 그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반경 70미터쯤이 환해지는, 얼굴 구조가 아예 바뀌는 듯한 대단한 웃음 말이다. 이제 승훈의 얼굴은 점점 뼈에서 미끄러지고 있고 정윤은 승훈이 죽어버린 게 슬픈지, 그 웃는 얼굴을 못 보게 되어서 슬픈지 헷갈릴 때가 있다.

작가의 말

장르문학을 쓸 때도 쓰지 않을 때도 나는 한사람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관심이 바깥을 향하는 작가들이 판타지나 SF를 쓰게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

<7교시>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특성은 번지는 것에 있으므로 머지않은 날에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정 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도 됩니다. 천체투영관에서 태양계 파트를 틀어주실 때,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설명하실 때 말해도 됩니다. 저기에 친구가 산다고, 갈릴레이의 위성 중 하나에 친구가 산다고요.
우리가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안, 잘 안 돼서 답답하지. 그래도 결국은 우리의 회복력을 믿어야 해. 인간이 매 순간 배우고적응하는 존재라는 걸,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걸 믿어야 해. 지금 네가 스스로 느끼는 네 존재가 얼마나 연약해 보일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안너는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밤이 되면 나는 다리를 떼어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그림자 다리가 다시 그 자리를 찾아왔다. 마치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한 감각.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다시 환지통이 느껴졌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통증도 없었다. 눈을 감고 몸을 정적 속에 놓아두면 나는 안전하고 안락했다.

사람들은 나를 무대로 다시 불러줬다. 그들은 내가 절망을 이겨내고 다시 춤추는 모습을 보고싶어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었던 내가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정상에서 추락한 무용수가, 고통을 딛고 또 한 번 정상으로 오르는 이야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나를 앉혀놓고 끔찍한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무대로 보내 그 모든 것을잊게 만드는 눈부신 도약을 펼치라고 했다. 나는그것을 제법 잘 수행해냈다. 수술과 재활로 진 빚을 모두 갚았고 3년에 한 번씩 의족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나는 나의 고통을 팔아서 생존했고, 때로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모멸감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도약해야 했다.

나는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은 강인해요. 당신의움직임이 나에게 영감을 줘요. 어느 순간부터는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더는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질문도 그만두었다.

"유안 씨, 그거 알아요? 그곳의 귀환자들은 아예 치료도 거부하고, 움직임도 포기하고 침상에만누워 살아간대요. 구호단체들이 그렇게 지원을 많이 보냈는데도,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다고요. 그에 비하면, 유안 씨는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해요.
도와주겠다는 손길이 그렇게 많은데, 다 포기하고 게으르게 누워만 있다니. 정말 너무 한심하지 뭐예요. 그런데 유안 씨,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아무리 돕겠다고 해도 일어나질않아요. 자기 몸을 책임지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인데도, 나몰라라 하고 스스로를 포기한 거지. 어쩜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 난 이해가 안 돼.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므레모사에서는 삶의 권력을 고정된 것들이 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끝내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의사의 회고를 읽고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바라왔는지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유안, 난 아무리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모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도우러 온 사람들이었는데, 선의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이용하다니. 그들을 비참한노예로 만들다니. 어떻게 그것이……."

"그래서 도울 수 있게 했잖아요. 선의를 베풀 수있게 했어요."

"모두가 므레모사에 그러려고 왔죠. 도움을 베풀러 왔고, 구경하러 왔고, 비극을 목격하러 왔고, 또 회복을 목격하러 왔어요. 그래서 실컷 그렇게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행복한 결말 아닌가요?"

작품해설

재난이 벌어진 자리에서, 방문자들은 그 재난의 흔적을 목격하고 고통을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재난은 이목을 집중시킨다. 재난에서 생겨난 고통만으로도, 이 고난을 겪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서사를 기대하는 것만으로, 재난은 충분히 ‘스펙터클spectacle‘을 선사하는 볼만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수전 손택은 SF가 영화와 만났을 때 "예술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인 재난"을 재현하며, 구경거리 위주의 형식을 취하면서 고난과 재난에서 미적인 쾌감을 즐기게 한다고설명한다. 이러한 쾌감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 ‘숭고sublime‘,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이 위협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낸 불쾌에서 쾌로 전이하는 감정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말

시간이 흐르면 어떤 죽음은 투어의 대상이 된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이면서 침범하고 훼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쓰며 그 사실을생각했다.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쓰면서 ‘아,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좋아했었지‘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빠져나왔다.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걱정되지?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걱정하는 마음?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