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김기현 지음 / 복있는사람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 하나님과 인간을 보여주는 거울

김기현의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있는 사람, 2012))를 읽고

 

긴 쉼 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자신의 고통이 있었기에 그의 말은 더 절실했고 사변으로 흐르지 않았다. 이런 그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고통에 대한 그의 말에 나는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와 자녀를 교통사고로 잃고 난 다음 쓴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성서유니온)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흥을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출판사의 요청대로 쓰지 않고 3년이라는 세월을 보낸게 고마웠다. 그 아픔을 녹여 이런 책을 냈으니까! 그만큼 고통에 대한 그의 생각은 풍부했으며 또한 명료했다.

저자가 고통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주제는 너무나도 무겁다. 고통이라는 주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에 대해서도 묻고 답하고 있다. 이것이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과 다른 점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만큼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싯처의 책이 피상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자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이 그 책에 들어있다. 그러나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마치 교의학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깊고 풍부했다. 이것은 이 책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비전의 열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항상 대중성과 학문성을 모두 포괄하는 책을 내고 싶었으니까.

고통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이 바로 하나님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우스가 이해한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가 이해한 하나님, 혹은 이신론의 하나님과 유사하다. 그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의 하나님은 고통당하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들만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으로만 고정시켜 놓은 채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 함께 울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도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내가 겪고 있는 그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고통은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하는 저자의 말은 옳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23). 유한성이 인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창조는 필히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서로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은 스스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부족함이 우리에게 고통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족과 결핍이 어떻게 악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 저자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통자체가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참 인간이 되어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고통에 대해 저항하라고 하는 저자의 일침 역시 되새겨 들어야 한다. 어쩌면 부르짖고 통곡하라고 고통이 주어졌는지 모른다. 아픔을 억압하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그렇게 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고통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이 큰 위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고통 속에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